[왜냐면] 증세 없는 기본소득, 무조건 불가능한가 / 이상민

한겨레 2021. 3. 1. 18: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상민 ㅣ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증세 없는 기본소득이 가능할까? ‘값싼 납으로 황금을 만들 수 있을까’와 비슷한 질문처럼 들린다. 증세 없는 기본소득은 연금술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역사는 묘해서 연금술과 같은 황당한 시도도 인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근대 화학 발전의 상당 부분은 연금술 덕이라고 한다.

나는 기본소득에 찬성하지 않는다. 부양의무제 없는 강화된 기초생활보장제도, 폭넓은 근로장려세제, 전국민 고용보험, 의료보험 보장성 강화, 아동수당, 기초연금 확대 등 기존 복지제도가 완벽해지는 것이 기본소득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기본소득 논쟁이 더 뜨거워지기를 바란다. 기본소득이라는 연금술 덕분에 재정개혁이 이루어지고 복지제도 개혁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금액이 무조건적, 정기적, 그리고 현금으로 지급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이 조건의 기본소득을 위해선 증세가 필요한 게 자명하다. 그러나 증세 이전에 재정개혁 논쟁이 먼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적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어떨까? 예컨대 연 100만원 기본소득에 필요한 50조원 정도는 증세 없이 가능할까? 경북대 최한수 교수는 지난 <한겨레> 칼럼에서 조세감면 축소 등 재정개혁도 기존 수혜자의 반발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게 가능하다면 왜 지금까지 조세감면 정비 시도가 계속 실패했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루쉰에 따르면 길이란 것은 원래는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길이 된다고 한다. 연금술이 됐건 기본소득이 됐건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다고 믿게 하고 재정개혁의 길을 걷다 보면 그게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최 교수는 구체적인 세출 조정 방안을 밝히지 않는 한, 세출 조정을 통한 증세 없는 기본소득은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고 한다. 구체적 항목을 말해보자. 지금도 재정의 칸막이에 갇혀서 놀고 있는 돈이 많다. 기금이나 특별회계의 법적 요건으로 정부 돈이 돌지 못하고 갇혀 있는 현상을 재정의 칸막이라고 한다. 흔히들 돈이 없어 걱정이지 많아서 걱정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넘치는 돈을 걱정(?)하는 곳이 많다. 한쪽에서는 돈이 모자라지만 다른 쪽에서는 돈이 넘쳐나는 비효율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장애인고용촉진기금이 있다. 장애인 의무고용을 채우지 못한 기업의 돈을 거둬 초과고용한 기업에 주는 기금이다. 그런데 과태료를 내는 사업장은 급속도로 늘지만, 초과 고용한 기업은 정체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이 기금의 여유 재원만 1조원에 달한다. 1조원으로 이자놀이만 하고 있다. 아니, 이자놀이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 2020년 6월 기준 기금 수익률은 마이너스다. 기금법을 바꾸어서라도 이런 남는 돈을 장애인에게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새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발전기금에도 2천억원의 여유 재원이 있다. 코로나19로 힘든 영화인들에게 지출할 재원이 없어서 못 쓰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국민체육진흥기금에 있는 1조원의 여유 자금도 일반회계에 전출해 적극적으로 재정 운영을 했으면 좋겠다. 스포츠토토라는 국가가 허락한 사행산업의 열매를 해당 기금에서 독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져간 돈을 쓰지도 못하고 ‘돈맥경화’를 만드는 것은 더 문제다.

나는 기금개혁, 지출구조조정, 조세감면 정비 등 재정개혁 등을 통해 증세 없는 50조원 마련 방안을 시뮬레이션한 바 있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자신하지만, 정치적으로 가능한지는 확신 못 한다. 또 50조원을 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연 10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보다 앞서 열거한 다수의 기본 복지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더 좋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재정개혁 시 발생하는 기득권을 무마할 힘이 있다. 내가 재정개혁을 통해 50만원 손해 보지만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떨까? 기본소득 반대론자와 기본소득 찬성론자가 좀 더 마음을 열고 생산적인 논쟁을 하다 보면 재정개혁이라는 부산물을 얻을 수도 있다.

연금술의 신인 헤르메스는 “너희들이 바로 신임을 모르느냐?”라고 했다. 납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한다. 납 속에 숨어 있는 금처럼 고귀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 연금술의 진정한 의미라고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속에도 신처럼 고귀한 부분이 있고, 납과 같은 주장에도 황금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