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말하고 듣기의 공중보건

한겨레 2021. 3. 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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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정희진의 융합 _18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언어의 물질성에 주목한 프로이트

인간의 개념을 새롭게 제시

상담(相談)은 서로 말하고 듣기

말하기 치료는 무의식의 언어화 과정

타인의 말을 듣기, 놀라지 않기

사회 윤리, 공중보건으로서 상담

올 설 연휴 어느 독거 중년의 상황. 전기 합선으로 난방, 온수, 취사가 안 되고, 매 끼니 복용하는 약까지 떨어졌다. 광장공포증에 낙상으로 발목에 깁스를 해서 움직일 수 없다. 다음은 그녀의 생활을 아는 지인들의 반응이다. “선생님 댁에서 반경 150m 안에 수리업체 많습니다”, “언니 집이 오래됐잖아. 평소에 관리했어야지”, “요즘도 마트에서 브루스타 팔아요.” 실현 불가능한 조언에 은근한 비난까지. 말을 ‘예쁘게’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연휴에 놀랐겠어요” 이 한마디면 될 것을.

말은 본디, 칼이다. 강자의 무기도 약자의 무기도 될 수 있지만, 나는 듣는 사람인 ‘집도의’(執刀醫)의 도구라는 점에 희망을 건다. 모든 경청 행위는 “반응해야 한다”는 부채감을 동반한다. 질병, 빈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귀찮음, 무관심, 멍청함도 반응 중 하나다. 전기가 끊겼다는 소식은 전기를 공급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듣는 이는 자신이 해결사라는 착각과 부담 때문에, 불가능을 제시함으로써 말하는 이가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일깨워준다’.

프로이트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말로 육체적 고통을 치료(treatment)할 수 있게 되었다. 수술이나 주사, 투약이 아니라 속 시원히 말함으로써 두통, 공수병(恐水病), 혼수상태, 시각장애, 마비, 환각, 실어증, 근육통, 장독(杖毒)까지 완화되거나 낫는다. 우리가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therapist), 역술인을 찾는 이유다. 아픈 사람을 탓하는 사람도 많다. 신학자 메리 데일리는 이런 이들을 “폭력범”(the/rapist)이라고 했다. 그만큼 가치관과 인격적 성숙에서 나오는 말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통증으로 나타나는 신체화증상(somatization)은 흔한 일이다. 아픈데 병원에 가면 ‘정상’이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이 따로 있지 않기에, 심인성은 진짜 원인일 수 있다. 질병은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하지 않은 상태(dis/ease)다. 분노, 한, 울화통(鬱火痛)으로 미칠 것 같을 때, 우리는 “암에 걸릴 것 같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다.

무의식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내가 생각하는 사상가 개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같은 뜻이지만, thinker보다 思想家(사상가)가 훨씬 정교하다. ‘家’ 때문이다. 그가 지은 사유의 집은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며 방대하다. 문지방(閾値, threshold)의 높낮이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피터 게이의 표현을 빌려보자. “프로이트는 인류에게 치명적인 모욕을 가했다. 그는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노예의 위치로 끌어내렸다. 정신분석이라는 무기를 들고 인간 집단의 기초를 이루는 예술, 종교, 문명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간 문명의 해부학자였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정신분석학과 이를 둘러싼 논쟁을 다룰 수 있는 사람, 방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만은 확신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프로이트가 창안한 정신분석 심리학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는 많은 분야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식은 인식자의 자기 심리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앎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결국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모르면 자신이 아는 지식도 알 수 없다.

정신분석은 프로이트 자신의 철저한 자기 분석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 유대인 정체성과의 끊임없는 협상, 1923년 구강암을 시작으로 평생 서른 번이 넘는 암 수술, 우정과 파탄을 거듭한 인간관계…. 의사인 그의 첫 번째 환자는 그 자신이었다.

그의 핵심적 업적 중의 하나는 리비도와 무의식 개념의 발명이다. 무의식은 인간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꿈이나 정신분석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드러나지 않는 의식을 말한다. 무의식을 인정하든 안 하든,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무의식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우리는 무엇을 무의식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무의식은 언어의 구조를 갖게 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사회 밖에 있지 않다.

현대사회에서는 ‘내면의 상처 받은 아이가 카우치에 누워 있을’ 시간이 없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은 여러 가지 방식(현실요법, 교류분석이론, 인지치료…)으로 대중화, 간소화되었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의학 처치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에 필수적이다. 인간은 직면하기 두려운 현실, 부정적 감정을 무의식에 집어넣는다. 이는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너무 깊숙한 곳에 있으면 꺼내기 어렵고 방어기제만 남는 공격적인 사람이 된다.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고 통제하려 들거나 남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 능한 사람은, 자기 무의식에 문제가 있는 이들이다. 무의식은 인격의 핵심이다.

융합으로서 상담

나는 상담(相談)이라는 단어에 감탄한다. 이 말은 카운슬링, 세러피, 컨설팅 등 여러 의미를 아우른다. 한국어가 영어보다 더 정확한 경우다. 진로상담, 법률상담, 노동상담, 연애상담, 취업상담, 육아상담‘도’ 전문가의 조언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담은 글자 그대로, 서로 이야기하는 일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픈 사람, 환자(患者)가 아니다. 단지 이야기하러 온 사람, 내담자(來談者, client)다. ‘정신병자’가 아니라 내담자다. 정신과 계통의 환자는 몸이 아픈 사람이지 미친 사람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스승이었던 요제프 브로이어를 빼놓을 수 없다. 정신분석학의 성립에는 브로이어가 치료한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자’인 ‘안나 O.’(가명)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통찰력 넘치는 적극적인 내담자로서 대화 능력이 새로운 이론을 창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안나 O.는 훗날 사회사업가, 여성학자로 활발히 활동한 실제 인물인 베르타 파펜하임이다. 유명한 용어인 말하기 치료(talking cure), 말하는 도중 느낀 카타르시스를 “굴뚝 청소”(chimney sweeping)라고 표현한 이도 파펜하임이다(모두 영어 표현으로, 그녀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

타인의 경험이나 고통을 듣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왜 놀랄까. 의심? 세속과 거리가 멀다는 우월감? 그냥 즐겁게 살고 싶은 욕심? 모두 아니다. 그저 무례, 무지, 공감 능력 부족 때문이다. 상담심리학 개론서들에 의하면, 상담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인생에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능력(capacity)이다. 이는 상담자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질이다. 우리는 누구나 내 이야기를 판단 없이 들어주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기와 듣기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개인도 덜 아프고 사회도 건강하다. 이것이 사회 윤리, 공중보건으로서 상담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게 말하는 행동은 “통장 번호를 알려주는 일”과 같다는 인식,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의 결과는 우울과 자살의 사회다. 외로운 침묵, 말하기를 포기한 불신, 소통을 대신하는 물리적 폭력…. ‘환자’의 말에 사로잡힌 ‘의사’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내담자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좋은 사람은 타인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 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한다.

프로이트만큼 오독, 적, 인간적 결함 논란이 많은 사상가도 드물 것이다. 논쟁은 끝이 없다. 칼 포퍼의 비판이 가장 신랄한데, 정신분석학은 반증이 불가능하므로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융합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다. 명확한 과학 혹은 학문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도 자신을 과학자나 연구자라고 여기지 않았다(“정신의 정복자”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턱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론은 보편적이지 않다. 19세기 유럽에서 이성애자 중산층 남성을 기준으로 성립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성>(Femininity)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저의 이론은 여성들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성의 남근 선망은 남성 사회가 공정치 못하다는 예입니다. 저의 여성성 이론은 정말로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것입니다. 여성성에 관한 연구는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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