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44] 아웃 오브 아프리카 | 바람처럼 스쳐 간 사랑이 남긴 선물
남들은 다 가진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나는데 찾아 헤매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 출신의 카렌에겐 사랑이 그랬다. 백작 부인이 되어 사교계에서 화려하게 살아가길 꿈꾸었던 그녀는 결혼을 코앞에 두고서야 약혼자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데 파혼한 그녀는 또다시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다. 약혼자의 동생이자 오랜 친구였던 브로와 서둘러 결혼해버린 것이다.
카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정을 이루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형과 결혼하려 했던 여자, 상실감을 털어내려는 듯 자신과 재빨리 결혼해버린 카렌에게 브로는 다가서지 못한다. 고향 덴마크를 떠나 케냐의 농장에서 시작한 그들의 결혼생활은 첫날부터 삐걱댄다.
카렌을 사랑하면서도 남작이라는 작위 말고는 경제적 능력이 없던 브로는 그녀의 돈으로 벌인 132만㎡(약 40만 평)의 커피 농장 사업마저 팽개친 채 집을 떠나 사냥과 술과 여자로 시간을 보낸다. 카렌은 낯선 대륙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농장 관리까지 떠맡는다. 간절하진 않았어도 손에 쥘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오기가 생기는 법,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한 그녀는 잠시 돌아온 브로에게 아이를 갖자고 한다. 브로는 영국과 독일 간 전쟁에 참전하겠다며 그녀에게서 더 멀리 달아난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 무렵, 카렌은 아프리카 대륙을 바람처럼 떠도는 남자, 데니스를 만난다.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녀를 끌어당긴다. 내면 깊숙이 갇혀 있는 그녀의 열정을, 문을 열어주기만 하면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자유에 대한 열망을 데니스도 알아본다. 만남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우정보다는 진하고 사랑이라 부르기엔 아쉬운 감정을 쌓아간다.
그때까지도 카렌이 원한 건 남편이 머무는 따뜻한 가정이었다. 그녀는 전선에서 필요하다는 물품들을 싣고 브로를 만나기 위해 멀고 위험한 길을 달려간다. 그러나 반갑게 재회하고 돌아온 카렌은 브로에게서 매독이 전염된 걸 알게 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치료를 위해 덴마크에 갔던 카렌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돌아온다. 상처 말고는 아무것도 나눌 수 없는 관계가 된 브로와 카렌은 별거한다.
하나를 잃고 나면 서둘러 다른 것으로 빈자리를 채우는 카렌은 원주민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커피 농장에도 열성을 보인다. 브로가 떠난 집에는 데니스가 자주 찾아온다.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니스에게 카렌은 천천히 빠져든다.
여자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짓고 다듬고 꾸미며 자신이 만든 작은 세상에 남자가 머물길 바란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큰 세상을 꿈꾼다. 그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세상을 여자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럴 수 있다면 그녀는 더 멋진 세계를 창조할 텐데,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꿈은 완전히 하나로 포개어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커피 열매는 빨갛게 익어간다. 데니스와 카렌의 만남은 지속하고 브로는 그들을 질투하면서도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이혼을 제안한다. 카렌은 데니스와의 결혼을 원하지만, 그는 세상이 정해준 길을 걷는 것도,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한곳에 머물러 사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랑은 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까, 카렌은 마음이 아프다.
살다 보면 이 순간을 맞이하려고 태어났어, 하며 감사하게 되는 날이 있다. 카렌에겐 데니스를 만나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대칭을 이루는 데칼코마니처럼, 모든 것을 단숨에 잃어버리고 앞이 캄캄해지는 날도 온다. 수년간 농장에 들인 노력이 풍성한 첫 수확으로 돌아왔지만 기쁨도 잠시, 예기치 못한 화재가 그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파산한 카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차압당한 땅에서 원주민들이 쫓겨나지 않도록 총독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것뿐이었다.
데니스가 돕겠다고 하지만 카렌은 거절한다. 그녀가 원한 것은 아내가 되어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었다. “나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카렌이 고향으로 떠나는 날, 배웅해주겠다던 데니스는 그러나, 오지 못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그녀보다 먼저, 더 멀리, 영원히 떠나버린 것이다.
실화 바탕의 동명 소설 각색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덴마크 작가 카렌 블릭센이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실제 이야기를 담아 1937년에 출판한 동명 소설을 각색, 시드니 폴락 감독이 1985년에 발표한 영화다. 사랑을 뿌리로 상실과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식민지 개척 시대가 배경인 만큼 점령하고 소유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데니스는 세상이 말하는 사랑도, 카렌이 원하는 사랑도 주지 않았다. 대신 몇 가지 선물을 남겼다. 그녀의 소설적 재능을 알아보고 글로 써보라며 만년필을 건넸고, 어디에 가든 길을 잃지 말라며 나침반도 줬다.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는 축음기도 선물했다. 경비행기에 카렌을 태우고 창공을 날며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을 보여줌으로써 ‘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도 나눠줬다.
카렌은 데니스가 사랑하는 자유를 온몸으로 느끼며 비로소 그의 영혼과 하나가 된다. 데니스가 카렌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카렌이 고향으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추억하며 글을 쓸 수 있게 한 힘, 그것이 데니스가 카렌에게 남긴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한결같지 않다. 그래도 영원한 사랑은 있다. 헤어지고 다시는 볼 수 없다 해도 함께한 기억을 간직하는 한, 그 사랑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버린 잠깐의 인연이었을지라도 그로 인해 삶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면 불멸의 사랑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시간과 함께 계속 성장하는 사랑이다. 사랑이란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인생을 살아갈 샘물 같은 의지를 선물하는 일이다.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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