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3·1운동이 평양에서 시작됐다는 것일까

정다슬 2021. 3. 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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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위광남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실장과 대담 형식의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북한의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도 이날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죄악의 역사'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제의 폭압에 의해 불과 몇 달 사이에 10여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육당하고 삼천리강토는 피바다로 변했다.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 앞에 저지른 죄악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그 대가를 청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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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7곳 중 6곳이 北쪽
北에서 3·1운동 위상 높지 않아.."영도없어 실패한 운동"
매년 일제 만행 규탄.."일제 만고죄악 철저히 계산할 것"
2월 10일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2차 전원회의 3일차 회의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사진=조선중앙통신 캡처)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시작된 대중적인 독립시위 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봉기는 전국적 판도로 급속히 번져졌다”

1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위광남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실장과 대담 형식의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조선요리점인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모두 체포된 후 학생 대표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다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3·1운동이 촉발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런데 북한은 왜 3·1운동의 기원을 평양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서울뿐만이 아니었다.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 평북의 선천과 의주, 함남 원산 등 7곳 중 6곳이 북쪽 지역이었다.

민족 대표 33명 중 31명이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였던 만큼 기독교 교세가 강했던 북한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많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3명 중 15명은 북쪽 출신이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장대재 언덕과 숭덕학교 운동장에 2500여 명에 달하는 학생과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평양의 만세 시위는 3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서울 파고다공원의 만세시위보다 1시간이 더 빨랐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북한에서 3·1운동의 위상은 우리나라만큼 높지 않은데 이는 “당과 수령의 영도가 없고 부르조아(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불견실한 입장과 무저항주의적 정치투쟁노선으로 인해 실패”(김일성 저작집)한 운동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족 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배신행동이었으며 일제 강점자들에 대한 비굴한 투항 행위”(조선전사)를 저지른 이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헌법 전문)며 국가적인 기념을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북한에서는 3·1절을 국경일이나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인민이 피 흘리고 싸울 때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운동만 진행했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나라의 독립을 선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타산(계산)하고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원조를 구걸했다”(조선전사)며 폄하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북한은 1990년 평양에서 열린 ‘3·1인민봉기 71돌 기념보고회’에서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에 의해 주도됐다고 발표하는 등 3·1운동을 김일성집안 우상화에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같은 인식 차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1운동 100주념 기념사업’을 북한과 공동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을 때는 실제 추진과정에서 북한과 적잖은 마찰이 있을 것이란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다만 북한 역시 매년 3·1절마다 노동신문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도 신문은 “3·1 인민봉기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 투쟁”이라며 “일제는 우리 인민의 정의로운 항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는 극악한 범죄적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또 “3·1인민봉기는 우리나라 민족해방 투쟁사에 자기의 뚜렷한 자욱(자국)을 남긴 전 민족적 반일항쟁으로서 오늘도 전체 조선인민의 기억 속에 역역히 남아 있다”며 “일제의 만고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며 철저히 계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도 이날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죄악의 역사’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제의 폭압에 의해 불과 몇 달 사이에 10여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육당하고 삼천리강토는 피바다로 변했다. 과거 일제가 우리 인민 앞에 저지른 죄악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그 대가를 청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다슬 (yamy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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