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떡갈나무와 대나무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2021. 3.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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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로 나가려면 20개쯤 되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이 계단이 해마다 말썽이다. 콘크리트로 매년 새로 발라 놓아도 겨울 한파가 한번 몰아치고 나면 금이 가고 으스러져서 다니지 못할 정도다. 3년째 그러더니, 올해는 나무로 공사를 했다. 이제야 제대로 했다 싶다. 시멘트가 보기에는 더 튼튼해 보일지 모르지만, 눈과 비바람, 추위와 더위를 잘 버티는 것은 오히려 나무라는 사실을 바뀐 관리소장님이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잘 큰 떡갈나무는 거대하고 힘차다. 반면 대나무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가느다란 것들은 태풍이라도 올라치면 꺾일 듯이 눕는다. 그래도 떡갈나무가 부러지고 넘어갔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대나무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떡갈나무는 제 혼자 땅을 꾹 움켜쥐고 서 있는 반면, 대나무는 땅속으로 모두 뿌리가 연결되어 실은 대숲 전체가 한 나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땅 위로는 속이 비어 여유롭게 휘어지고, 땅 아래로는 모두가 서로 꽉 붙들고 있으니 별로 두려울 것이 없다.

흔히 대나무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왔는데, 그것을 대쪽 같은 곧음에서 유추하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 대쪽의 곧음은 오히려 약점이 되어서, 어느 한쪽에서 갈라지기 시작하면 맨 끝까지 순식간에 쩍 하고 벌어진다. 그래서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다. 대나무의 절개는 연대에서 나온다.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평소에는 그런 것들이 우람해 보이지만, 정작 거센 바람을 만나면 홀로 서 있는 것들은 어쨌거나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 반면, 땅 아래로 굳게 잡고 있는 손들은 우리가 평소에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위기 상황이 되면 힘을 발휘한다.

코로나19를 버텨온 것은 실로 시민들 간의 연대였다. 서구의 석학이라는 사람들은 우리 방역의 성공이 유교적 전통이나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그것은 민주적 시민성과 수평적 개인주의로 가능했다.(‘시사인’ 663호 기사)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우리는 서로 평등하고 자유로울 때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K방역’의 성공 이유였다.

그 연대성이 약해지고 있다. 그것이 무너지면 결국 각자도생밖에는 남지 않는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은 전쟁에서 국가가 적을 방비할 의지와 능력이 없으니 맞서 싸우기보다는 제 한 목숨 부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서로 간의 유대와 돌봄, 연대와 협력을 일부러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편이 어차피 없으니 할 수 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20년도 전인 외환위기 때는 나라의 복지가 없어서 소위 전통적 가족관계가 사회안전망을 대신했는데, 코로나19를 맞아서도 나라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나라의 곳간을 걱정하지만, 국민이 없으면 나라가 무슨 소용인가. 국민이 나라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 곳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작동해야 한다. 시민들이 함께 행동하면 달라진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정치적 효능감이 작동해야 한다. 정치적 대표와 시민들 간에 책임과 응답이 살아 있어야 한다. 국가와 국민들 간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 사이의 연대를 국가가 보증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의 문제다. 공자는 오래전에 나라는 신뢰 없이 설 수 없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사람들은 이웃의 사랑으로 산다고 했다. 아렌트는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고 행동할 때 바로 거기서 권력이 생겨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신뢰와 협력, 사랑과 연대가 나라를 지탱하고 사람들을 살게 한다는 것이 요즘에는 통계 지표로도 곧잘 확인된다. 그런데 기획재정부의 예산 성과지표에서는 여전히 측정되지 않는다. 관료 탓이 아니다. 정치공동체의 생존과 비전은 결국 가치의 문제이며,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코로나와 기술 발전으로 일자리와 소득이 줄어든다면, 그 일자리와 소득을 나누어서 함께 살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에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겨울이 오면 아무리 큰 나무라 해도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대나무들은 푸른 잎을 잘도 달고 흰 눈을 맞은 채로도 변함이 없다.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대숲은 포근하다. 아이가 더 크면 눈이 푹푹 빠지는 겨울 대숲에 가서, 왜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부러지지 않는가에 대해 말해 주어야겠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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