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세상]개혁을 가로막는 훈육적 처벌주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21. 3.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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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조지다’가 ‘후리다’처럼 표준말이라니 써본다. 우리는 조지는 걸 참 좋아한다. 심지어 제도를 개혁할 때도 그렇다. 개혁에 저항하는 악당을 지목해서 호되게 때리면 개혁이 된다고 생각한다. 해로운 관행을 살펴 이로운 순환을 만드는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상 나타난 문제들을 고쳐나가는 데 미숙하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언론 개혁을 하자면서 언론에 대한 징벌을 더하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일단 조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진다고 윽박질러야 개혁이고 뭐고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현장의 기자가 무엇을 잘못하고, 일선 편집자가 왜 무력하며, 언론경영진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살펴서 개선의 유인책을 만드는 데 관심 없다. 언론과 표현의 영역이라도 형사처벌로도 안 되니 민사적 징벌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주 언론법학회와 언론진흥재단이 공동주최한 언론대상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긴급 토론회는 조금 달랐다. 토론자들은 추상적 법리를 놓고 정파적으로 다투는 양상을 버리고, 제도의 정합성과 운영에 대해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논의했다. 언론 개혁이라는 대의를 따른다고 해도 어떻게 제도를 설계해야 바람직할지 모색하는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논의 중에 내가 평소 주장해 온 제언이 나와서 반가웠다. 현행 형사적 처벌 조항들을 유지하면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는 일은 무리하니, 먼저 각종 형사상 처벌조항을 폐지하는 것을 전제로 민사상의 피해구제를 강화하는 방법을 도입해 볼 수 있다는 제언이다. 이 제언을 따라 언론중재 제도를 포함한 현행 제도를 개선하려면 어떤 준비와 절차가 필요한지 같이 논의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러나 긴급 토론회 지상중계를 보고난 내 심정은 착잡하다. 특히 걱정스러운 점은 제도개선의 순서를 바꾸자는 타협 아닌 타협안이 나올까봐 그렇다. 먼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고 나중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나 모욕죄 등 악법들을 폐지해 나가면 된다는 식의 제언 말이다. 우리나라 입법부가 대체로 그랬다.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이라도 일단 통과해 놓고, 나중에 위헌판결이 나도 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무슨 일만 터지면 먼저 부실한 법안이라도 급조해서 발의해 놓고 나중에 수정하면 된다는 입법 선정주의를 따른다.

입법이란 인민의 의지를 제도적으로 형성하는 일이다. 따라서 입법자는 목적·수단 간 합리성에 주의해야 한다. 새 법이 제도 개혁이라는 목적에 복무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시민의 기본권을 해치지는 않을지 미리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제도의 정합성도 고려해야 한다. 개혁적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법리와 실천이 명실상부한지, 개혁안이 기존 규제체계와 어떻게 어울리는지 검토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발언의 자유와 관련한 정책 중에 특히 무리한 제도가 많다. 예컨대 사실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제삼자가 고발하면 경찰이 수사하고, 검사가 기소해서, 국가가 형벌권을 동원해 처벌할 수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이 법이 합헌이라고 판단했는데, 다수의견은 그 근거 중 하나로 진실한 주장이라도 사생활 침해가 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처벌과 피해구제 방법을 찾기보다 무리한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사법부는 보수적이니 그렇다고 하자. 제도를 형성하는 입법부가 왜 이리 처벌중심으로 생각하고, 진보라는 더불어민주당마저 왜 이러나. 시민을 달래고, 어르고, 필요한 경우 호되게 때려서라도 국민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훈육주의적 보수파라면 모를까, 국가권력의 남용에 저항하고 시민의 자율성을 북돋우기 위해 싸워온 진보파가 도대체 왜 이러느냐는 것이다. 나는 의심한다. 개혁이라는 게 만들어 나가는 일이 아니라 조지고 후리면 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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