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빈살만

워싱턴/김진명 특파원 2021. 3.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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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개혁군주’, 뒤에서는 反체제 언론인 살해 승인
/로이터 연합뉴스

미 국가정보국(ODNI)이 2018년 발생한 사우디아라비아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을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승인했다'는 기밀 보고서 일부를 지난 26일(현지 시각) 공개했다. 빈살만 왕세자가 “2017년 이래 사우디 안보 및 정보 조직을 절대적 통제하고 있으므로 사우디 관리들이 이런 성격의 작전을 왕세자의 허가 없이 실행했을 리 없다”는 내용이었다. 80여년간 금지됐던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활기찬 사회를 만들겠다는 ‘비전 2030′을 추진하며 ‘개혁 군주’로 행세했던 빈살만 왕세자가 ‘냉혹한 독재자’로서의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란 점을 확인하는 보고서였다.

1985년생인 빈살만 왕세자는 2017년 6월 26살 많은 사촌형 빈나예프 당시 왕세자를 밀어내고 제1 왕위 계승자가 됐다. 사우디의 실권을 거머쥔 그는 ‘위로부터의 서구식 개혁'을 추진하며 아랍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개혁적인 지도자 면모를 과시했다. 2018년 3월 미 CBS방송 인터뷰에서 “샤리아(이슬람 율법)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품위 있고 존경받을 만한' 옷을 입으라고 했지 반드시 검은 아바야(전신을 가리는 옷)이나 검은 두건을 쓰라고 하지는 않았다”며 “어떤 종류의 옷을 입을지 결정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반(反)이슬람적'이란 이유로 1970년대 사우디에서 사라졌던 상용 영화관도 2018년 4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해 6월엔 1932년 건국 이래 줄곧 운전면허를 딸 수 없었던 사우디 여성들에게 운전을 허용했다.

서구에서 ‘MBS’란 영어 이니셜로 불리며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그의 이미지는 2018년 10월 2일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해외에서 사우디 왕실을 비판했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당시 59세)는 그날 결혼에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터키 이스탄불의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그 길로 사라졌다. 피살설이 불거지자 빈살만은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카슈끄지는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한 시간 정도 지나 떠났다”며 “근거 없는 루머”라고 했다. 하지만 터키 측은 카슈끄지가 약물을 강제 투약받고 토막 살해 당한 정황을 확보하고 있었다.

ODNI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 정보 당국은 카슈끄지의 살해 당시 빈살만이 참모들에게 “시키는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실패하면 해고 또는 체포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참모들이 빈살만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의 동의 없이 민감한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또 카슈끄지 살해 당일 이스탄불의 총영사관에 도착한 팀 중에 “사우디 왕실의 학술·미디어연구소(CSMARC)를 위해 일하거나 이에 관련된 관리들이 있었다”는 것도 빈살만의 개입 증거로 평가했다. CSMARC는 빈살만의 최측근인 사우드 알카타니가 이끌고 있었는데, 알카티니는 2018년 중반 공개적으로 “왕세자의 승인 없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정적인 증거로 미 정보 당국은 카슈끄지 살해에 개입한 팀 가운데 “사우디 왕실경비대 중 ‘신속개입군(RIF·Rapid Intervention Force)’으로 불리는 빈살만의 엘리트 개인 경호팀원 7명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을 제시했다. 신속개입군은 “왕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의 명령에만 응하고 국내외에서 반체제 인사 억압에 직접 참여해 왔다”는 것이다. 미 정보 당국이 카슈끄지 살해에 관여한 인물로 명시한 18명 중에는 빈살만의 해외 순방에도 동행했던 신속개입군 야전지휘관 마헤르 무트레브가 포함돼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신속개입군이 이전에도 해외 반체제 인사들의 강제 송환 작전을 수행했고, 유명 여성인권운동가들에 대한 구금과 가혹행위에도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ODNI 보고서는 “빈살만은 카슈끄지를 왕국에 대한 위협으로 봤고 그를 침묵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폭넓게 지지했다”면서 그가 카슈끄지 살해를 승인했다고 평가했다.

ODNI 보고서가 공개된 다음 날인 27일 사우디 정부는 세계적인 패션학교인 뉴욕 파슨스스쿨 학장을 지낸 버락 캄락을 ‘사우디 패션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 사우디를 세계적 패션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고 사우디 관영 영문 매체 아랍뉴스가 보도했다. 두 얼굴을 가진 빈 살만의 거침없는 행보는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EPA 연합뉴스

☞카슈끄지 살해 사건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정책을 비판하던 중견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위 사진 오른쪽>가 2018년 10월 결혼 서류 준비차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가 본국에서 급파된 요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다. 배후로 지목된 빈살만은 부하들이 독자적으로 벌인 범죄라고 해명했지만, 그가 지시했다는 정황이 잇따라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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