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백범일지에서 삭제된 사람 [오래 전 '이날']

조해람 기자 입력 2021. 3. 1. 00:00 수정 2021. 3. 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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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민들이 삼일절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3월1일 ‘85세 항일여걸 찾았다’

1919년 3월1일. 만세 소리가 온 나라를 뒤덮었습니다. 이날 어딘가에서 깃발을 흔들던 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일렁이는 인파를 보며 그는 그동안 알던 세상을 스스로 무너트렸을 것입니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약속을 얼핏 엿봤을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품고 1925년 그는 중국으로 떠납니다.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이야기입니다. 30년 전 이날, 경향신문은 당시까지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화림을 중국 다렌에서 만나 말을 듣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1991년 3월1일 경향신문


이화림은 중국 다렌의 시립 양로원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85세. 1920년대에 남편과 헤어진 뒤 평생을 돌보는 이 하나 없이 살았지만 “젊음을 불사른 항일독립투쟁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봅니다. 중국으로 건너간 이화림은 김구의 밑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합니다.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암살공작을 주도하는 ‘결사대원’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지령문을 전달하는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윤봉길과 이봉창이 그의 동료였습니다.

1932년 윤봉길이 보온병 폭탄을 일본군 간부들에게 던진 날, 원래는 이화림도 함께할 예정이었습니다. 부부로 위장해 검문을 통과할 계획이었죠. 김구가 ‘단독 결행이 성공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해 계획에서 빠졌지만, 후에 밝힌 바로는 공원 입구까지 같이 갔다고 합니다. 이화림은 회고록에서 “추풍 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이화림의 행적은 김구의 ‘백범일지’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화림이라는 이름 석 자도 끝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화림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김구는 자신과 정반대의 생각을 하던 이화림에 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고 합니다. 이념의 시대였고 사상에 목숨까지 내거는 시절이었다지만, 이건 좀 팍팍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이화림도 끝까지 김구와 함께하지는 않았습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 공산당의 항일전쟁에 참가했습니다. 일제가 무너지고 1949년 중국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부녀처 주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화림은 “김구 선생은 조국 독립을 이상으로 삼았던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나는 당시 공산주의를 신봉하기는 했지만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는 똑같았습니다”라고 김구를 평가했습니다.

경향신문이 만난 이화림은 회고록 출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과거를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역사의 진실은 밝혀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단어는 ‘사실’이 아닌 ‘진실’입니다. 85년의 삶에서 그가 어떤 진실을 찾았을지 궁금해집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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