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SW 수주 '기술' 아닌 '가격'으로 결정.. 사업 부실화 우려

김건호 2021. 2. 28.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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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참여제한제도 탓 저가 경쟁
기술점수 낮아도 가격으로 뒤집기 가능
2021년 최소 5000억 대형 사업 쏟아지는데
출혈 경쟁에 수익성 낮아 참여도 '주저'
발주처, 90% 이상 '공동이행방식' 선택
문제 발생 때 연대책임 물어 中企 피해
입찰 방식 개선·기술력 확보 대책 시급
국내 공공 소프트웨어(SW)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정부가 공공 SW 사업에 사실상 대기업 참여를 제한하면서 곳곳에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전자정부시스템 수출은 반토막이 났고, 대기업의 빈자리를 차지한 중견업체들은 저가 출혈경쟁으로 수익성 악화 위기에 처했다. 특히 사업 수주가 기술력보다는 최저가 입찰이 우선시되고 있다는 지적과 발주처에게만 유리한 불공정한 계약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기술이냐 가격이냐” 대기업 외면받는 공공 SW 사업

28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차세대 지방세입정보시스템 2단계 사업자가 선정됐다. 차세대 지방세입정보시스템 구축사업은 행정안전부가 2005년 구축 후 15년 가까이 운영해 온 지방세입정보시스템을 전면 재구축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 사업은 지난해 10월부터 유찰을 거듭해 올 초 네 번째 공고가 나왔고, 결국 중견기업인 메타넷대우정보가 단일 응찰했다. 지금까지 이 사업은 예산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대기업 참여제한 예외사업으로 약 1000억원이라는 큰 규모에도 이번 2단계 사업에 대형 IT기업이 단 한 곳도 참여하지 않아 유찰이 거듭됐다.
이 같은 공공영역의 주요 차세대 사업들은 올해에만 최소 5000억원 이상 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예정된 조달청의 국가전자종합조달시스템, 법무부의 형사사법정보시스템, 한국전력공사의 차세대 전사자원관리시스템, 국민연금공단의 지능형 연금복지 플랫폼 등 굵직굵직한 공공 SW 사업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지방세입 2단계 사업과 같은 유찰사례가 재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사업자는 수익성을 이유로 참여를 주저하게 되고, 발주처는 사업자를 제때 구하지 못해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사업자를 선정해도 사업 부실화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는 세금 낭비로 돌아온다.

공공 SW 사업에서 저가 경쟁이 반복되는 이유로 업계에서는 2013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대기업 참여제한제도’를 꼽는다. 공공 SW 사업은 대기업의 공공시장 독점을 막아 역량 있는 중소·중견기업을 육성한다는 목적으로 시행됐지만, 간혹 나오는 참여제한 예외사업에 대기업들이 참여하면서 고질적인 저가경쟁을 촉발하고 있다.

국내에서 공공 SW 시장은 민간시장에 비해 SW기업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발판이 된다. 실제 국내 공공 SW 시장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연평균 11.8%, 2013년 이후(2013~2018) 연평균 5.5%로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공공시장이 민간시장에 비해 SW기업의 장기적인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 공공 SW 참여기업은 민간 사업자에 비해 폐업률이 낮아 안정적이다. 2018년 기준 공공 SW기업 폐업은 전체 폐업 SW기업 중 33.8% 정도로 민간 SW기업에 비해 낮았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공공 SW 사업 수주의 승부처가 기술이 아닌 가격이라는 점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실제 경쟁업체 간 기술점수는 소수점 아래의 매우 근소한 차이에 불과한 것이 공공 SW 사업의 현실이다. 하지만 제도가 보장해 주는 80% 최저가를 적어내면, 가격점수로 종합점수를 뒤집을 수 있다. 가격으로 사업수주가 결정되는 환경에서는 기술 개발과 투자에 집중하기보다는 최저가만 적어내 사업을 따내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정부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우리 SW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지난해 말 ‘기술평가 차등점수제’를 도입했다. 기술점수에서 이겼지만 가격점수에서 뒤처져 사업을 수주하지 못하는 경우를 고려한 제도다. 가령 1등은 100점, 2등은 95점의 기술점수를 부여해 기술력 있는 기업을 대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업계는 이 제도의 실효성을 의문시한다. 차등점수제의 세부기준이 없고, 이 제도를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은 전적으로 발주처에 있기 때문이다.

◆업계 “공동이행방식은 발주처에게 유리한 불공정계약”

공공 SW 사업의 또 하나 문제는 입찰방식이다. 여러 회사가 컨소시엄으로 공공 SW 사업에 참여하는 경우 발주자는 분담이행방식과 공동이행방식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분담이행방식은 참여한 기업들이 최초 계약한 사업분담 비중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공동이행방식은 참여한 기업들이 공동으로 과업을 수행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연대로 지는 방식이다. 법적으로 두 방식이 모두 가능하지만, 발주처가 공동이행방식을 선택하는 비율이 90% 이상이다. 사업관리 편의를 위해 공동이행방식으로 발주하는 것이 관행화됐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공동이행방식은 발주처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공정한 계약이라는 인식이 크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발주처는 주사업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계약 연좌제’인 셈이다. 발주처는 각 기업의 책임소재를 복잡하게 관리할 필요가 없지만,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에게는 연대책임을 져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참여 기업들 간 소송과 같은 분쟁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공동이행방식은 중소기업에게도 큰 부담이다. 중소기업들끼리 수행하는 프로젝트에서 책임이 없는 경우라도 공동이행방식에 의해 소송에 휘말려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계약제도 개선을 위한 목적으로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계약제도 혁신 TF(태스크포스)’를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업계는 입찰 하한가를 현행 80%에서 90%로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건설업의 경우 60% 최저가를 보장하는 등 다른 산업과 형평성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선과제 중 하나인 공동이행방식 관행 개선은 논의 테이블에조차 올리지 못한 상태다.

IT업계 관계자는 “SW 산업의 경우 기술개발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인데 정부의 대책은 기술이 아닌 가격에만 맞춰져 있다”며 “발주기관이 기술 중심으로 업체를 평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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