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칼럼] 선을 넘는 존재들

한겨레 2021. 2. 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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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칼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공

홍은전|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도살장을 탈출한 소가 도로 위를 달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소를 포획하기 위해 바짝 따라붙은 소방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것이었다. 카메라가 소의 엉덩이 쪽에서 소가 나아가는 방향을 비추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는 소의 시점에서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6차선 도로와 자동차, 교차로와 신호등, 아파트단지와 주택가를 지났다. 나는 이상한 슬픔과 막막함에 압도되었다. 소가 바라보는 것을 나도 바라보았고 소가 했을 생각을 나도 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살아 있는 소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자리는 축사와 도살장,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트럭뿐이고, 그는 방금 그 트럭에서 인간을 들이받고 탈출한 것이었다. 마취총을 맞은 소는 몸에 화살이 박힌 채 2시간을 더 달리다 끝내 사살되었다.

2019년 서울 도심과 외곽에 낯선 동물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도살장 앞에 나타난 그들은 배고픈 돼지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닭과 소에게 물을 주었다. 대형마트 정육 코너에 나타나선 자신들이 만났던 존재들의 붉은 사체 위에 흰 국화를 올리며 애도의 노래를 불렀고, 크리스마스가 되자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가 스테이크를 먹으며 사랑과 우정을 속삭이는 사람들을 향해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라고 외쳤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우유와 초콜릿이 여성인 소의 몸에 강간과 임신, 출산을 반복하게 하여 그 새끼를 빼앗고 젖을 착취한 것이라며, 그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뜻으로 광화문 대로에서 여성들이 상의를 벗고 시위했다. 이들이 속한 단체의 이름은 디엑스이(DxE·다이렉트 액션 에브리웨어), ‘어디서든 직접행동’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이 만약 길거리에서 캠페인을 했다면 나는 그들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마트와 롯데리아, 배스킨라빈스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기 때문에, 거기서 햄버거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들을 향해 “죽이지 마십시오. 빼앗지 마십시오. 이것은 폭력입니다” 하고 외쳤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선을 무참히 넘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맹렬히 비폭력적이고 맹렬히 과격한 그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정보를 주려는 게 아니었다. 어떤 질서에 도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부딪쳐서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인간도 동물이다!” 하고 외치는 이 터무니없이 진지한 청년들이 나에겐 새로운 인류의 탄생처럼 보였다. 동시에 그들은 나의 오래된 동료들, 그러니까 중증장애인들의 모습과도 겹쳐졌다.

2001년 서울 도심에 이전엔 나타난 적 없었던 낯선 인간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첫 등장은 지하철 서울역에서였다. 경적을 울리며 들어온 전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두운 선로를 비추자 수십년간 시설과 집구석에 감금된 채 살아왔던 존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외쳤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채 모든 권리를 빼앗겼던 그들은 선로를 점거해 지하철을 멈춰 세우면서 한국 사회라는 역사의 무대에 충격적으로 등장했다. 비장애인 중심의 질서를 온몸으로 들이받는 저항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지난 20년간 줄곧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싸워왔다. 지하철을 막았고 장애인의 죽음을 막았다. 차도로 뛰어들었고 선량한 시민들의 이동을 방해했다. 장애인을 버리고 폭주하는 야만적인 사회의 발목을 잡았고, 그렇게 법과 제도, 예산을 만들어냈다.

장애인들은 철저히 버려졌고 동물들은 체계적으로 착취당한다. 그들이 당하는 차별과 폭력은 완벽하게 가려져서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며 지하철과 버스를 막는 장애인, 비인간 동물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폭력을 멈춰야 한다며 고깃집에서 동물해방을 외치는 인간 동물. 나에겐 그들이 꼭 도살장에서 탈출해 도심을 가로지르는 소처럼 보인다. 한눈에도 몹시 이질적인 그들이 이 사회 곳곳을 들이받을 때 그 견고한 인간 중심성과 비장애인 중심성이 잠시 균열을 내며 드러났다 사라진다. 선을 넘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모욕과 멸시가 화살처럼 빗발치고 거대한 동물이 백주 대로에서 총을 맞고 살해된다. 그러나 진실을 본 존재는 반드시 선을 넘는다. 그리고 선을 넘은 존재들만이 볼 수 있는 어떤 세계가 있다. 나는 그들로부터 더 아름답고 위험한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목숨을 걸고 탈주하는 비인간 동물과 짐승 취급을 거부하며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 그리고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동물이 되기 위해 싸우는 어떤 인간 동물들 사이에서 나는 이 세계를 다르게 감각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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