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카리브해 섬에 '살충제 시위' 벌어진 까닭은

김윤나영 기자 2021. 2. 28. 17: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카리브해의 작은 섬 마르티니크는 프랑스령의 해외영토다. 베네수엘라보다 북쪽에, 쿠바보다는 동쪽에 있는 마르티니크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쓴 탈식민주의 이론가 프란츠 파농의 고향이기도 하다. 인구 40만명이 채 안 되는 이 작은 섬에서 27일(현지시간) 1만명 넘는 시민이 프랑스 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르몽드는 이날 마르티니크에서 시위대 1만~1만5000명(경찰 추산 5000명)이 거리로 나와 살충제 클로르데콘의 피해를 프랑스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마스크를 쓴 시민들은 드럼 등 악기를 들고나와 코로나19 방역 명목으로 금지된 노래 부르기를 하며 정부에 저항했다. 수천명의 시민들은 “면책 금지” 등의 구호를 외쳤다.

마르티니크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프랑스의 지상낙원’으로도 불리지만, 살충제 클로르데콘 오염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 시민단체 등은 2006년 “정부가 클로르데콘 사용을 허가해 시민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면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14년간을 질질 끌어온 재판은 파리고등법원에서 ‘시효 만료’로 기각될 위기에 처했다고 라디오 프랑스가 전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만든 클로르데콘은 어린이 두뇌발달을 저해하고 조산 위험을 증가시키는 유해 화학물질이다. 미국에서는 1975년 이 농약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심각한 병에 걸린 이후로 사용을 금지했다.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클로르데콘을 잠재적 발암물질로 지정하기도 했다. 2009년부터는 전 세계적으로 생산이 금지됐다.

프랑스는 1972년부터 1993년까지 카리브해 해외령 섬인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의 바나나농장에서 이 살충제를 써왔다. 독성이 보고되면서 프랑스도 1990년 본토에서 사용을 금지했지만, 프랑스가 지정한 해외 영토에서는 농장주들의 요구로 1993년까지 쓰도록 허가했다. 마르티니크 정부는 1969년 이미 클로르데콘의 잠재적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다.

프랑스의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마르티니크는 카리브해의 제주도보다 작은 섬이다. Pixabay 제공


20년간 쓰여온 농약으로 마르티니크의 땅, 물, 가축, 농산물이 오염됐다. 연안 해안의 3분의 1이 오염됐고, 농경지의 30~50%가 오염돼 일부는 경작을 중단했다. 마르티니크 성인의 92%, 과들루프 성인의 95%는 혈액에서 농약인 클로르데콘 성분이 검출됐다. 농약 독성이 700년까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프랑스24는 내다봤다.

농약 때문인지 서인도제도 인구의 전립선암 발병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2018년 프랑스 본토의 성인 전립선암 발병율은 10만명당 99명이었는데, 마르티니크에서는 158명이었다. 보호장비 없이 맨손으로 농약을 뿌려온 농장 노동자들이 쓰러져갔다. 한 바나나 농장 노동자는 2018년 르몽드 인터뷰에서 “암, 암, 암…. 암이 우리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17세기부터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 살던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노예를 이주시켜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인구 80%를 차지하는 두 섬의 아프리카계 시민들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경제적으로 차별받고 있다. 다수의 흑인 노동자들이 소수의 백인 노예소유주 후손들이 보유한 대형 바나나농장에서 저임금을 받고 일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1일 마르티니크의 환경 재앙이 프랑스의 식민지배 연장선상에 있다고 했다. 프랑스 정부가 백인 농장주들의 이윤을 위해 아프리카계 노동자들의 건강과 해외 영토의 환경 문제를 경시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는 데까지는 소송 이후 12년이 걸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18년 이번 오염을 ‘집단적 무지’에 의한 “환경 스캔들”이라며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크롱 대통령은 클로르데콘을 “발암성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마크롱 대통령이 언급한 “그러한 ‘스캔들’, 즉 ‘식민지 범죄’는 프랑스 본토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본토에서 살충제 공중 살포를 법으로 금하고 있지만, 쌀농사를 짓는 프랑스령 기아나와 같은 해외 영토에는 허용한다. 프랑스군은 프랑스령 해외영토인 폴리네시아에서 1960년~1990년 핵실험을 했지만, 주민들이 입은 방사능 피해 규모를 숨겨왔다.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