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군기잡듯 매년 새 공시 요구.."데이터 수만건 일일이 뒤져야"

송형석/이지훈 2021. 2. 2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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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 공시..서류작업에 짓눌린 대기업

대기업 A사에서 공시 실무를 담당하는 김모 부장에게 5월은 ‘야근의 달’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요구하는 연간 공시와 분기 공시 자료를 함께 제출해야 해서다. 매년 새로운 항목이 추가돼 일거리가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다. 김 부장은 “신설되는 공시 항목은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에도 분류가 돼 있지 않다”며 “수천~수만 건의 거래 데이터를 일일이 들여다봐야 하는 부담 때문에 전담인력을 추가로 뽑았다”고 말했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매년 늘어나는 공시 부담

2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매년 대규모 기업집단 현황 공시 매뉴얼을 개정하며 공시 항목을 늘리고 있다. 2014년엔 ‘계열사 간 순환출자 현황과 변동 내역’ 항목이 새로 만들어졌다. 기업집단에 소속된 기업들의 순환출자 현황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지분율, 주식수, 장부가액 등을 모두 표시하라는 주문이었다. 순환출자 고리 변동 사항은 연 단위가 아니라 분기 단위로 공시하도록 했다.

2016년엔 ‘특수관계인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의 내부거래 현황’이 추가됐다. 총수일가의 지분율이 30%(상장사 기준) 이상인 회사가 다른 계열사나 특수관계인과 지난 3년간 어떤 거래를 했는지를 신고하라는 얘기였다.

2017년엔 ‘지주회사 체제 밖 계열사 현황’과 ‘금융·보험사의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 현황’, 2018년엔 ‘계열사 간 상표권 사용 거래 현황’ 등의 항목이 신설됐다. 지난해에도 공시 항목이 늘어났다. ‘지주사와 자·손자·증손회사 간 자문용역 및 부동한 임대차 거래 현황’을 추가로 발표하도록 했다.

올해는 신설 항목이 유독 많다. ‘물류와 SI(시스템통합) 관련 거래 내역’을 포함해 새로 생겨나거나 개정된 항목만 아홉 건에 달한다. 주요 기업이 이구동성으로 공시 부담을 호소하는 배경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공정위가 기업에 ‘서류 폭탄’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다”며 “기업집단 현황 공시를 ‘군기잡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과태료에 괘씸죄까지

공정위가 ‘물류와 SI 거래 내역’을 공시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공정위는 2019년에도 수시 조사 형식으로 주요 기업에 SI와 물류에 관한 거래 내역, 내부거래 비중, 경쟁입찰 여부 등과 관련한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명분도 같았다. ‘일감 몰아주기’가 물류와 SI 계열사를 통해 이뤄지는 사례가 많아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당시 조사는 유야무야됐다. 물류와 SI 거래의 범위가 기업마다 제각각인 탓에 기업 간 비교가 쉽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공정위도 물류와 SI 거래만 따로 발라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공시를 강요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내부거래 비중을 줄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기업들의 불만이 커지자 지난 18일 설명회를 열고 ‘물류와 SI 거래 내역’ 등 일부 항목의 적용 시점을 올해 5월에서 내년 5월로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유예기간을 준 셈이지만 기업들은 달라진 게 없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모든 거래를 들여다보라는 건 행정 편의주의”라며 “일정액이 넘는 거래 내역만 공개해도 공시 제도의 취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기업집단은 계열사 자산 합계가 5조원 이상인 그룹사를 뜻한다.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64개 기업집단, 2325개 업체가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분류돼 정기적으로 기업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공시를 하지 않으면 1000만원, 일부를 누락하거나 허위 사실을 공시했을 때는 최고 500만원의 과태료가 나온다.

벌금은 항목별로 부과한다. 10개 항목을 공시하지 않았다면 1억원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 지난해 한 대기업은 3억원대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기업들은 벌금보다 ‘괘씸죄’가 더 무섭다고 토로한다. ‘불성실 공시 기업’으로 찍히면 공정위의 특별 조사를 받을 수 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송형석/이지훈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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