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 슬라보이 지제크

한겨레 2021. 2. 2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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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괴테의 시 ‘마왕’에서 아버지는 환청을 듣는 아들을 품에 안고 급히 말을 달리지만 의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이미 죽어 있다. 독일의 메탈 밴드 람슈타인의 노래 ‘달라이 라마’는 이 시를 모티브로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비행기에 타고 있다. 아들은 바람의 왕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들을 듣고 아버지에게 호소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들을 있는 힘껏 안는다. 시간이 지난 뒤, 아버지는 자신이 아들을 너무 꼭 껴안은 나머지 아들이 자신의 품 안에서 질식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들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무섭고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우리에게로 오렴. 잘해줄게. 우리는 너의 형제란다.” 이 노래가 지닌 모호함은 중요하다. 아버지는 외부로부터 다가온 위협에서 아들을 보호하려다 “아들의 영혼을 두 팔로 짓눌러 육체 바깥으로 내보냈다.” 이 노래는 표면적으로, 우리를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불교적인) 보호가 오히려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우리를 삶에서 내쫓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노래에는 그런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노래의 후렴구다. “한 걸음 한 걸음 파멸을 향하여/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죽음충동’이라고 부른 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다. 이는 죽음 그 자체를 추구하는 충동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삶’을 고집하려는 반복 강박이다.

이 후렴구는 “라 팔리스씨는 죽기 1분 전에는 살아 계셨습니다”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말, 얼마나 오래 살든 결국에는 모두 죽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를 뻔하지 않은 말로 만드는 윤리적 차원이 있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그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반드시’ 살아야 한다.

인간이 작은 바이러스에도 무력한 상태에 빠지는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임을 코로나 위기가 절실히 일깨워주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 후렴구의 태도를 취해야 할 때다.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진짜 문제는 우리가 불확실성 속에서, 지속되는 우울증에 빠져,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상실한 채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람슈타인의 노래에서 비행기를 뒤흔드는 난기류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는 코로나다. 그럼 아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무엇일까. 국가가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방역조치를 통해 시민들을 옥죄고 있다고 주장하는 조르조 아감벤이라면, 아들을 죽인 것은 그를 질식시킨 아버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감벤은 최근 시를 썼다. “의료의 이름으로 자유를 폐지한다면, 결국 의료도 폐지될 것이다. 삶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것을 폐지한다면, 결국 삶도 폐지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에도 우리가 그 이전에 누리던 사회적 삶을 똑같이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감벤의 목소리야말로 아들이 들었던 유혹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우리는 그 목소리를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아감벤의 말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자유의 이름으로 의료를 폐지한다면, 결국 자유도 폐지될 것이다. 인간적인 것의 이름으로 삶을 폐지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것도 폐지될 것이다.

람슈타인의 노래는 우리가 현재의 교착상태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코로나와의 싸움을 삶에서 물러나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삶을 사는 방법으로 보는 것이다. 많은 의료 노동자들이 매일 코로나 위기와 싸우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위선적인 칭송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존만을 갈구하는 기계가 되어 벌거벗은 삶을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신이 처한 위험을 알면서도 날마다 목숨을 걸고 코로나와 싸우는 이들이야말로 지금 그 누구보다도 더 살아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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