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도 못 피한 축출이혼.. 강자 앞에 무력한 가족법 [특별기획취재 - 가정 못 지키는 가족법]

김청윤 입력 2021. 2. 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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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대家, 내연녀에 수상한 증여
법조계 "재산 분할 염두" 지적
현재 1100억대 재산 법정공방
정몽익, 본처에 경고성 메시지 전달
"전향적 자세 보이면 도움" 제안도
KCC측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사안"
파탄 시점 이후 재산은 분할 못해
'딴살림' 길수록 유책배우자에 유리
남은 배우자·자녀 보호조항 없어
'이혼 후 부양제도' 전면 보완 목소리
양육비 떼먹는 행위도 처벌 강화를
위자료·중혼 처벌 규정도 정비해야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 뉴스1
헌법재판소가 2015년 간통죄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 뒤 가족 관계가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법원은 이혼 소송에서 가정 파탄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받아들이는 ‘파탄주의’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실적으로 혼인생활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됐을 경우 가정 파탄의 책임 유무를 묻지 말고 이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런 세태로 가정 해체 현상은 심화하고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는 배우자와 자녀는 법적 사각 지대에 놓이게 된다. 취재팀은 ‘범현대가의 축출이혼’ 사례를 취재하면서 민법의 가족 관계 조항이 정작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봤다. 가정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정몽익 KCC 글라스 회장 이혼 사건을 통해 현행 가족법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한다.
 
범현대가(家)인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이 중혼(重婚) 상태인 내연녀에게 수백억원대 자산을 건넨 것으로 확인됐다. 정 회장은 아내 최은정(58)씨와 두번째 이혼 소송 중이다. 정 회장이 내연녀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고 이혼을 원치 않는 부인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관련, 현행 가족법이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는 배우자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 회장은 2015년부터 최근까지 내연녀 A씨에게 수십억원씩 수차례에 걸쳐 현금 100억원 이상을 증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의 모친인 조은주 여사도 2000년대 중반 A씨에게 현금 20억∼30억원 규모를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증여 사실은 정 회장 부부의 1100억원대 이혼소송 등에서 언급된 적이 없는 내역이다.

이 외에도 A씨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빌딩, 삼성동의 아파트 등을 보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남권 부동산중개업계는 청담동 빌딩에 대해 140억∼150억원 수준, 삼성동 아파트는 15억∼17억원대로 각각 평가했다. 앞서 정상영 명예회장은 2017년 8월 KCC 계열사이던 KAC(코리아오토글라스주식회사, 이후 KCC글라스로 합병) 지분 5만주(0.25%)를 정 회장의 혼외자에게 증여한 사실이 알려진 바 있다. 형인 정몽진 KCC 회장도 2020년 4월 정 회장의 혼외자에게 KCC글라스 지분 17만여주를 증여해 입길에 올랐다. 정 회장의 혼외자는 현재 KCC글라스 지분 19만여주, 약 100억원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A씨와 혼외자 가족이 보유한 자산은 수백억원대로 추정된다. 법조계에서는 현금 증여 등의 경우 근거가 있다면 사해행위취소소송을 통해 재산을 원상 복귀시킨 뒤 재산분할의 대상으로 따져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KCC 일가의 A씨, 혼외자에 대한 자산 증여가 본격화한 2015년은 정 회장이 아내 최씨를 상대로 제기한 이혼소송 1심에서 패소하고 항소를 시작한 무렵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이혼소송의 승패를 불문하고 종국적으로는 재산분할 다툼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증여일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또한 법조계 관계자는 “큰 흐름을 보면 정 회장 일가가 A씨에게 여윳돈을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며 “재벌가 돈 흐름치고는 독특한 양상”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외조카인 아내 최씨와 1990년 결혼해 1남2녀를 뒀다. 행복했던 것처럼 보이던 결혼생활은 정 회장이 2012년 1월 돌연 가출하면서 파열음이 났고, 이듬해인 2013년 정 회장이 최씨에게 이혼소송을 청구하면서 파탄을 향했다. 정 회장은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A씨와 2006년부터 교제했고 △2007, 2011년 혼외자 2명을 뒀으며 △2015년 A씨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전격 공개하며 “혼인이 사실상 파탄 상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대법원은 2016년 혼인 파탄의 책임이 정 회장에게 있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에 문제가 없고, 상고인(정 회장)의 상고 주장도 이유가 없다면서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정 회장은 3년 뒤인 2019년 다시 최씨를 상대로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 판례가 곧 변할 것”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최씨는 그간 “가정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다가 올해 초 이혼 반소(맞소송)를 냈다. 앞으로 정 회장과 최씨의 이혼소송은 정 회장 등 범현대가의 ‘축출이혼’(잘못이 없는 배우자를 내쫓는 이혼) 여부, A씨 및 혼외자가 축적한 재산의 재산분할 대상 여부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의 재산은 3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관련, 취재팀은 정 회장에게 전화와 문자로 사실관계 여부 확인과 해명을 요청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후 정 회장은 전화기를 꺼놓아 연락이 닿지 않았다. KCC글라스 측은 “회장님의 개인사여서 답변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밝혔다.
고(故)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 연합뉴스
◆정상영 명예회장 빈소에 정몽익 내연녀 참석… 본처는 불참

지난달 30일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세상은 ‘현대가(家) 창업 1세대’ 마지막 어른의 치열했던 84년 노정, 산업보국 열정 등을 앞다퉈 평가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가문 인사들이 일찌감치 빈소를 찾았고 정·재계 유력인사의 발길도 이어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가장 큰 장례식장 11호실. 취재를 종합하면, 유족과 조문객만 입장이 허락된 2층 빈소 안에선 영화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정 명예회장의 아들 삼형제 중 둘째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이하 정 회장)의 불륜, 중혼 등으로 얼룩진 가정사 때문이다. 장례 첫날인 1일, 정 회장과 ‘중혼적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인 A(43)씨가 빈소에 등장했다. A씨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정 회장 모친과 형 정몽진(61) KCC 회장의 부인이 A씨를 다른 유족에게 소개했다.

A씨가 현대가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정 회장과 2006년부터 교제를 시작한 A씨는 작년 7월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정몽준 이사장 장남) 결혼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엔 한복 차림의 가족들과 달리 일상복을 입고 참석했다. A씨는 정몽익 회장과 2015년 양가 부모 등 직계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결혼식 참석을 계기로 가문 전체 차원에서 정식부부로 인정받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현대가 사람들은 정 회장 가정사에 쉬쉬했다. 하지만 빈소에서 마주한 생경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대로 장성한 정 회장의 적자 3남매는 A씨가 유족들에게 소개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본처 최모(58)씨는 빈소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발인식이 열리고 있다.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이 아내 최은정씨와 사이에서 낳은 장남 제선씨(앞줄 오른쪽 팔에 상주 표식을 두른 이) 등 3남매가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현대가(家) 축출이혼’ 사건

“상고를 기각합니다.”

2016년 12월15일, 대법원 2부는 정몽익 회장(당시 사장)이 아내 최씨를 상대로 낸 이혼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심리 불속행 기각이었다. 상고 이유나 상고 사유가 적합하지 않아 본안 심리도 필요하지 않다고 대법관 네 명이 의견을 같이 했다. 2013년 5월 시작된 ‘1차 이혼소송’은 그렇게 3년여 만에 끝났다. 그러자 정 회장은 2019년 9월 다시 이혼을 청구하는 ‘2차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 대법원은 이혼 소송에서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바람을 피우는 등 결혼생활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이혼청구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정 회장이 이혼 소송에서 패소한 이유다.

범현대·롯데가 혼맥으로 관심을 끌었던 정 회장과 최씨의 31년 혼인생활은 어떻게 파탄이 났을까. 유일하게 본안을 따진 1차 소송 1·2심 판결문과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케이스는 범현대가에서 벌어진 ‘축출이혼’(무책배우자를 쫓아내는 이혼)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책임이 없는 배우자가 지키려 했던 가정이 남편 측의 압박에 파탄에 이르는 과정이 판결문에 담겨 있다.
세계일보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최씨는 2012년 5월과 8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면서 도합 세 차례 서울아산병원에 실려갔다. 그해 1월 정 회장이 가출한 직후다. 정 회장은 이 사례 등을 이유로 들면서 이듬해인 2013년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정 회장은 “최씨의 불치의 우울증, 수차례 극단적 선택 시도 등의 사유로 이미 부부로서 애정과 신뢰를 상실했다. 부부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1·2심 법원은 “우울증 발병 등은 별거 이후에 비로소 발현됐다”면서 “별거 이전에 최씨에게 특별히 정신적 문제가 있다거나 치료를 받은 전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정 회장은 이 밖에 최씨의 △피고의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생활방식, 인격 모독성 발언으로 인한 정신적 학대, 지나친 사치와 쇼핑 중독증 △시댁에 대한 패륜적인 언어폭력, 별거 △13년에 걸친 이혼 요구 △게으르고 편벽된 성격장애 증세 등을 이혼청구 이유로 주장했다. 이에 최씨는 “행복한 가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 없다”며 원고 측 주장을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가 제출한 증거에는 남편의 외도 사실을 모른 채 일상적인 부부처럼 지낸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재판부는 정 회장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 자료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주된 책임은 일방적으로 별거를 한 원고에 있다. 유책배우자인 원고는 그 파탄을 사유로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정 회장, 항소심에선 파탄주의 주장

1심 패소 이후 정 회장은 항소심 전략을 전면 수정한다. ‘유책 배우자=최씨’란 프레임을 버리고 ‘혼인=파탄상태’임을 주장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법정에서 A씨와의 관계를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자신은 △이미 2006년부터 A씨와 교제를 시작했고 △2007·2011년생 두 아들(혼외자)을 뒀으며 △2012년 1월 최씨와 별거 직후 A씨, 아이들과 동거했고 △2015년 12월 양가 부모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고 밝힌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원심과 달리 혼인 상태에 대해 “2012년 원고의 가출 이후 그 실체가 완전히 형해화돼 파탄에 이르렀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파탄의 책임’에 있어 “일방적으로 별거를 시작하고 성명불상자와 부정행위를 넘어 중혼관계를 유지한 원고의 잘못”이라며 “원고의 청구는 모두 이유 없어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특히 재판부는 “최씨가 정 회장과 성명불상자의 관계를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됐다. 현재에도 최씨의 심적 고통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최씨는 항소심 법정에서 정 회장의 부정을 처음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이 대법원에서 이혼 패소 판결이 확정된 이후 또다시 이혼 소송을 제기하자 최씨는 지난달 정 회장에게 이혼을 청구하는 반소(맞소송)를 냈다. 최씨가 8년 만에 정 회장의 이혼 청구를 수용하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금 100억대·강남 아파트 주고… 형은 주식 17만여주 증여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을 포함한 KCC일가가 내연녀 A씨와 그 혼외자에게 건넨 막대한 재산은 정 회장의 이혼소송에서 중대한 법적 쟁점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범현대가, A씨에게 증여 집중

21일 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A씨와 그 혼외자가 보유 중인 재산은 수백억원대에 이른다. 우선 순수한 현금만 따지면 정 회장이 100억원 이상, 정 회장의 모친이 약 20억∼30억원의 현금을 증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다 정 회장의 형인 정몽진 KCC 회장은 지난해 4월 ‘기묘한’ 증여를 단행했다. 정몽진 KCC 회장이 KCC글라스 지분 17만여주를 정 회장과 본처 최은정(58)씨 소생의 자녀들이 아닌, 정 회장과 A씨 사이의 혼외자에게 증여한 것이다. 금액은 당시 시가로 50억원에 달하는 주식이었다. 이를 통해 정 회장의 혼외자는 정 회장과 최씨 사이의 다른 자녀들을 제치고 단숨에 대주주로 올라섰다. 정 회장과 A씨 사이의 혼외자가 이런 증여 등을 통해 보유하게 된 KCC글라스 주식은 최근 시가로 100억원에 육박한다.
A씨가 현재 소유한 부동산 역시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등기를 열람해 보면 A씨는 2008년 6월 서울 삼성동의 전용면적 152.98㎡ 규모 아파트를 17억3500만원에 구입했다가 2019년 22억8000만원에 매각했다.

2018년 8월에도 같은 아파트 다른 동의 전용면적 59.98㎡ 규모 아파트를 13억5000만원에 매입했다. 이 아파트는 현재 시가로 15억∼17억원 정도로 평가된다. A씨가 이 아파트를 사는 과정에서 등기부에 남긴 주소지가 A씨 소유의 삼성동 아파트가 아니라, 강남구 논현동의 한 최고급 빌라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논현동의 최고급 빌라는 정 회장 소유로, 정 회장이 2015년 8월 37억5000만원에 매입한 것이다.

A씨는 2016년 9월에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토지를 사들여 2018년 4월에 6층 규모의 빌딩을 올렸다. 이 건물에는 현재는 귀금속과 보석류 등을 취급하는 가게 등이 입점해 있다. 부동산 업체 관계자는 “빌딩 시가는 140억∼150억원으로 평가되지만, 부동산 가격 증가세에 따라 건물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재산분할 따른 지배구조 변화 관심

법조계에서는 정 회장이 A씨에게 증여한 100억원은 재산분할 대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법무법인 설현의 김도희 변호사는 “남편이 불륜녀에게 현금 등을 증여했을 경우에 이 현금 등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본처가 재산 분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핵심 쟁점은 A씨가 증여받은 현금으로 빌딩과 아파트 등을 샀을 때, 이 부동산들도 정 회장과 최씨의 이혼소송 와중에 재산분할 대상이 되는지 여부다. 법조계에서는 A씨 소유의 부동산이 실질적으로는 정 회장의 소유일 경우 재산 분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 회장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지만, 명의만 A씨 소유일 때 재산분할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다만, ‘명의만 A씨 소유’란 점을 법적으로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앞으로 정 회장과 최씨의 재산분할이 KCC 전체의 지배구조와 상속구도에 영향을 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KCC그룹은 창업주 정상영 명예회장의 별세 이후 형제들이 교차로 보유한 계열사 간의 지분 정리가 관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정 명예회장의 세 아들 중 장남인 정몽진씨는 KCC를, 차남인 정몽익씨는 KCC글라스를, 삼남인 정몽열씨는 KCC건설을 이끄는 흐름을 보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지분이 서로 교차하고 있다.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은 KCC글라스에 대해 20.66%의 지분을 갖고 있어 확실한 1대 주주다. 그러나 장남인 정몽진 KCC 회장도 KCC글라스의 지분 8.56%를, 정몽진 회장이 지배하고 있는 KCC 역시 KCC글라스 지분 3.58%를 보유하고 있다. 정몽열 KCC건설 회장도 KCC글라스의 지분 2.76%를 소유하고 있다. 정 회장의 혼외자도 정몽진 KCC 회장으로부터 증여를 받아 KCC글라스 주식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

장남 정몽진씨가 회장으로 있는 KCC도 내부 지분이 얽혀 있다. 정몽진 회장은 KCC 주식 18.55%를 갖고 있어 1대 주주지만,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도 8.47%, 정몽열 KCC건설 회장도 5.28%의 KCC 지분을 갖고 있다. 삼남 정몽열씨가 회장으로 있는 KCC건설은 KCC가 36. 03%의 지분으로 대주주 지위에 있다.

정몽익 회장 측은 지배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재산분할 판결을 받더라도 주식을 담보로 맡기고 현금 대출을 받아 최씨에게 현금을 건넬 것으로 재계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KCC글라스 주식 가치 평가는 또 다른 법적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KCC글라스 주가가 낮아 정 회장의 주식 총액이 작게 평가될수록, 정 회장은 재산 분할 과정에서 유리해진다.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 KCC 제공
◆‘현대·롯데家’ 첫 결혼 세간 주목… 한진家와도 혼맥 얽혀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은 1990년 최은정(58)씨와 결혼했는데 이는 당시 현대가와 롯데가의 첫 결합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정 회장의 부친은 이번에 별세한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냇동생으로 맏형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 생전에 말투와 외모 등이 정주영 명예회장을 쏙 빼닮아서 ‘리틀 정주영’으로 불렸다.

최씨는 롯데가 일원이다. 모친이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 여사다. 아버지 최현열 CY그룹 명예회장은 롯데물산, 롯데캐논 등의 대표를 지내며 신격호 회장과 함께 롯데를 일군 창업 1세대다. 신 여사 부부는 2019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유일하게 고인의 백수(白壽, 99세) 축하자리에 참석했을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참고로 최씨의 언니이자 장녀인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은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과 결혼하면서 한진가와도 혼맥을 형성했다. 정 회장과 최씨는 중매 결혼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자산가들의 집을 돌면서 고가 수입품, 골동품 등을 방문 판매하던 사람들이 중간에 다리를 놨다는 것이다.

최씨는 정 회장과 결혼 이후 줄곧 가정주부로 지냈으며 1990년대에 두 딸과 아들 등 3남매를 차례로 낳았다. 정 회장은 내연녀 A씨와의 사이에서 2007년과 2011년 2명의 혼외자를 아내 몰래 얻었다.
◆"이혼 계속 거부 땐 불이익" 엄포 놓은 회장님

‘축출이혼’ 논란에 휩싸인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이 아내 최은정(58)씨에게 “이혼을 계속 거부하면 자녀들이 상속분을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법상의 상속 규정조차 무기로 활용하며 이혼을 압박한 것이다.

22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정 회장(당시 KCC 사장) 측은 2016년 대법원이 최씨를 상대로 청구한 이혼청구소송에서 패소 판결하자, ‘사장님이 사모님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란 취지의 입장을 최씨에게 전달했다.

정 회장 측 메시지의 골자는 ‘정 회장이 새로운 가족(내연녀 A씨와 혼외자들)을 위해 특단의 배려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씨가 이혼을 거부하고 계속 버틴다면 새로운 가족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고, 결국 그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최씨와 3남매에게 ‘특단의 불이익’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 회장 측은 최씨가 A씨 가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게 하면 상속에서 최씨와 최씨 자녀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최씨는 물론 최씨 측 자녀들이 상속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정 회장 측은 민법상 ‘유류분’ 청구 절차도 지목하면서 최씨 등이 법정 상속비율대로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행 민법은 사망자가 합리적인 범위를 벗어난 유언을 행사해 법정 상속인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경우에 대비해 재산의 일정부분에 대해서는 이들 상속인이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는 유류분 제도를 두고 있다. “상속되는 재산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해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와 함께 정 회장 측은 “대법원 판례변경은 시대의 흐름이고 시간문제”라면서 지금의 상태를 몇 년 더 늦추려다 화를 초래하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취지로 물었다. 대법원은 현재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을 배제하는 ‘유책주의’ 기조를 취하고 있지만 ‘파탄주의’(혼인 파탄 사실만 인정되면 이혼을 허락)에 대해서도 연구 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그러면서도 최씨가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이혼을 집요하고도 노골적으로 종용했다.

KCC글라스 관계자는 ‘상속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는지 여부에 대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정 회장 등 KCC 일가가 A씨 등에게 수백억원대 자산을 부당증여했다는 전날 세계일보의 의혹 제기에 대해서는 “정 회장이 현금을 준 사실은 있지만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면서 “어머니가 준 것도 없다고 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개인사에 관한 내용이고 소송 중인 사안인 만큼 이를 보도하는 것은 문제이고, 이에 대해 정 회장 등이 우려를 표했다”고 밝혔다. ‘축출이혼’ 여부에 대해서도 “그건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하는 표현인 것 같다”면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는 사연이 많아 정 회장도 답답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생활비 끊고… 사는 집 ‘급매’ 내놓고… ‘협의이혼’ 수용 압박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은 아내 최은정씨가 “이혼을 원치 않는다”며 맞서자, 최씨가 자녀와 살고 있는 자택을 처분하고 타고 다니던 정 회장 명의 차량을 회수하려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법조계는 정 회장 측의 이 같은 행위가 ‘축출이혼(무책배우자를 고의로 쫓아내는 이혼)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현행 가족법은 최씨처럼 가정 파탄의 책임이 없고 경제력이 약한 배우자를 보호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본처·자녀 사는 집 ‘급매’ 내놓고 차량 회수 시도

22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 회장은 2013년부터 2017년 사이 최씨와 자녀 3남매가 살고 있는 자택을 ‘급매’로 처분해 달라고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정 회장 명의의 이 아파트는 정 회장이 최씨, 3남매와 20년 이상 거주했던 곳이다.

이혼소송 재판부는 정 회장이 2012년 1월 일방적으로 가출, 별거하기 시작한 것을 혼인 파탄의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판단했다. 정 회장은 가출한 뒤 내연녀 A씨와 거주지를 기존에 최씨와 함께 살던 자택 인근에 마련했다. 이런 정황들을 고려하면 정 회장은 최씨가 ‘협의이혼’을 수용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최씨가 살고 있는 자택을 처분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상황을 아는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꽤 헐값에 나온 물건이다 보니 금세 구매 의향자가 나타났다”며 “최씨에게 연락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실이고, 집을 내놓은 적도 없다’면서 황급히 매물을 거둔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연히 안주인(최씨)이 알 거라고 생각해 ‘집을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는데 그분이 몹시 놀라 바로 가게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그분은 동네 중개업소마다 확인해서 등록된 매물을 취소하고 다녔다”며 “재벌가 사모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자택뿐이 아니다. 정 회장은 최씨와 자녀가 타고다니던 정 회장 명의 차량을 회수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와 KCC글라스 안팎에 따르면 이 회사 직원 수명이 5∼6년 전 최씨가 거주하던 집을 찾아가 차량을 가져가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최씨가 반발하자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직원들은 최씨에게 차량 열쇠를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견인차량을 부르려 했다고 한다. 직원들은 최씨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항의하자 돌아갔다.

한 가사 사건 전문 변호사는 “이혼을 압박하는 남편들이 흔히 하는 수법이 아내와 자녀가 사는 집과 차량을 처분하는 것”이라며 “일부 이혼전문 변호사는 이런 ‘테크닉’을 전문적으로 알려주고 돈을 벌기도 한다”고 말했다.
◆본처에 생활비 끊고 내연녀에게 거액 증여

최씨는 1990년 정 회장과 결혼한 이후 줄곧 가정주부로 지냈다. 최씨는 매월 정 회장에게서 생활비를 받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오랜 지인은 “최씨가 남편이 매월 주는 금액 안에서 생활비를 쓴다고 옛날에 말했다”면서 “집안 일을 봐주는 분, 운전해 주는 분 등 인건비가 가장 크다. 재벌가에서 쓰는 일정 선이 있는데 그 정도 수준”이라고 전했다.

최씨가 사는 동네의 지인도 “최씨가 언젠간 ‘비가 많이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샌다. 오래된 아파트여서 종종 수리를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 회장은 2012년 1월 집을 나간 뒤 매달 주던 생활비를 끊었다고 한다. 이 지인은 “생활비가 끊긴 이후에는 최씨가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최씨는 정 회장이 집을 나간 뒤 세 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 “(최씨의) 우울증 발병과 자살시도는 원고(정 회장)의 일방적인 별거 이후에 비로소 발현된 것”이라며 “별거 이전에는 특별히 정신적 문제가 있다거나 치료를 받은 전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A씨는 정 회장으로부터 2015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 100억원 규모의 현금을 건네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6층짜리 빌딩, 삼성동의 아파트 등도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정 회장 명의인 제주도의 한 고급 타운하우스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A씨가 이용한 고가의 리조트와 골프장 등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A씨를 잘 아는 한 인사는 “A씨가 메르세데스-벤츠와 벤틀리 승용차,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SUV(스포츠유틸리티차) 등을 고급 차량을 타고 다녔다”고 전했다.

◆유언상속 통해 재산 남기지 않을 수도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이 본처인 최은정씨에게 이혼을 강요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 중 하나는 상속이었다. 실제로 정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최씨와 자녀들에게 줄 상속 재산을 충분히 축소시킬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현행 민법상 최씨와 세 자녀들의 법적 상속분은 정 회장 재산의 약 70%다. 민법 제1012조에 따라 최씨와 최씨 소생의 3남매, 정 회장과 내연녀 A씨의 소생인 혼외자 2명을 포함한 5명은 1.5(최씨):1(적자녀1):1(적자녀2):1(적자녀3):1(혼외자1):1(혼외자2)의 비율로 정 회장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다. 최씨와 자녀들의 몫은 4.5(최씨+자녀1∼3)/6.5(상속인 전부), 즉 13분의 9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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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 회장은 상속 재산을 줄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 법정상속 대신 유언상속을 결정하는 게 먼저다. 정 회장이 사망하기 전 최씨와 자녀들에게 어떠한 재산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자신의 재산 중 65%(17/26)는 최씨와 자녀들에게 상속되지 않는다. 이 같은 ‘보복성 유언’의 가능성을 상정해 법은 유류분제도를 두고 있다. 상속 대상에서 제외된 근친자(상속인)의 생계를 보호하려는 취지이지만, 유류분은 법정 상속분의 절반까지만 인정된다.

재산 자체를 축소시켜 최종 상속분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혼외자에게 현금을 주거나 본인 계좌를 대신 쓰게 하는 등 법원에서 입증 가능한 유산을 최대한 줄여 최씨 등이 가져갈 수 있는 상속분을 줄이는 방식이다.

법인을 만들어 ‘재산 줄이기’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경영컨설팅사의 경우 컨설팅에 대한 시장가치가 애매하다는 점을 이용해 본래 가격보다 높게 거래된 것처럼 꾸미는 수법으로, 부동산 매매사는 개인 명의로 사야 할 부동산을 법인 명의로 구입하는 수법으로 탈법적으로 자금을 이전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유책배우자들의 상속 재산 축소행위를 차단할 제도적 방법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김지현 법률사무소의 김지현 변호사는 “주로 재판부가 입증하기 어렵도록 재산을 뒤로 빼돌리는 수법을 쓴다”며 “차후에 재판에서 패소해 빼돌린 재산을 복구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평소에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세무법인 나은의 이원식 세무사도 “업태와는 별개로 법인 이익을 주주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거나 주주들에게 우회 증여하는 방식으로 ‘재산 빼돌리기’를 할 수도 있다”며 “다양한 수법으로 법인을 악용해 차후에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지만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는 실정이다”고 지적했다.
◆파탄 책임 없는데 재산분할도 불리… 생활·양육비는 ‘독박’

의사를 꿈꾸는 남편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사실상 가장의 역할을 해온 A씨는 지난해 갑자기 날아든 이혼청구 소송 서류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병원을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남편이 “성격이 안 맞아 함께 못 살겠다”며 법원에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남편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사귀어온 여자가 있었다. 남편은 소유 재산들을 차곡차곡 빼돌린 상태였다. 날벼락을 맞은 A씨는 실의에 빠진 채 소송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 가족법은 ‘축출이혼’(유책배우자가 무책배우자를 고의로 쫓아내는 이혼) 위기에 놓인 A씨를 구제하거나 도와줄 수 있을까? 대법원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판례(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이 판례가 변경되지 않는 한, 남편의 이혼 청구는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A씨도 남편에게 양육비나 위자료를 요구할 법적 근거도 없다. 별거 상태에 있더라도 법률혼 상태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녀들 양육비를 건네도록 강제할 법도 없다. 소송이 종료될 때까지는 생활비와 자녀 양육비 등이 모두 A씨 몫으로 남는다.

원치 않는 이혼은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는 현실이다. 현행 유책주의 관점에서는 이혼 거부라는 강력한 대응책이 있지만 파탄주의가 도입되면 이마저도 사라진다. 축출이혼은 한층 수월해지고 이혼으로 인한 불이익도 없으니 유책배우자는 사실상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이 무책배우자인 최은정(58)씨에게 제기한 이혼소송에서 최종 패소하고도, “시대 흐름상 파탄주의가 도입될 것”이란 취지로 다시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강자의 부당행위에 법은 속수무책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재산분할은 이혼소송의 핵심 절차이지만 이와 관련된 법원 판례는 일방적으로 이혼소송을 당한 책임 없는 배우자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재산분할 기간 산정이 특히 그렇다. 유책배우자의 부정행위로 가정이 파탄 났을 경우, 우리 법원은 파탄 시점 이후라면 유책배우자가 취득한 재산은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가령 유책배우자가 2020년 말 가정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더라도 상대인 무책배우자는 2020년까지 형성된 재산에 대해서만 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2021년부터 벌어들은 수익은 유책배우자 몫이란 뜻이다. 따라서 법률상 혼인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더라도 일찌감치 배우자를 버리고 ‘딴살림’을 차린 기간이 길면 길수록 유책배우자에게 유리한 실정이다.
우리 민법이 유책배우자의 부정, 부당행위에 취약한 점도 문제로 꼽힌다. 곳곳에 유책배우자가 재산을 빼돌릴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최근 유책배우자들 사이에서 ‘핫한’ 수법이 ‘유언대용신탁’이다. 이는 사망자가 금융사에 사후 수익자를 지정하는 계약이다. 자산을 유언대용신탁에 맡긴 뒤 사후 수익자를 정하면 자산의 소유권은 신탁받은 금융기관으로 넘어간다.
거액의 보험상품에 가입한 뒤 내연녀나 혼외자를 보험 수익자로 지정해놓는 수법도 활용된다. 법무법인 SH의 남성태 변호사는 “내연녀와 혼외자에게 아예 현금을 주는 등 법정에서 입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산을 빼돌릴 수 있지만, 그건 초보적인 수법”이라며 “유언대용신탁이나 보험 등 합법적인 재산 빼돌리기 방법을 동원하면 유류분청구소송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억울한 이혼소송을 당한 배우자들이 협의이혼에 응하는 경우도 많다. 이때도 유책배우자는 재산분할 과정에서 상대 배우자에게 가는 몫을 줄이기 위해 민법 조항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법무법인 숭인의 양소영 변호사는 “결혼 역시 민법상 신의성실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영역인데도 유책배우자가 이혼청구를 하게 되면 무책배우자는 ‘왜 법은 날 지켜주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섣부른 파탄주의 도입 우려

이처럼 유책배우자들은 각종 편법을 쓸 수 있지만, 남겨진 가족을 보호할 법적 조항은 없는 상황에서 파탄주의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해외 주요국의 경우 이혼을 해도 남겨진 가족의 생계 안정을 위해 일정 기간 다른쪽 배우자에게 부양 의무를 부과한다. 이 조항에 기대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가정주부도 직업을 찾거나, 관련 교육을 받는 등 사회에 복귀할 여력을 가지게 된다. 이들 나라는 이혼이 보다 쉽게 결정되는 파탄주의를 채택하면서도 보완조항을 마련하고 있지만, 우리 민법에는 아직 이런 조항이 구비돼 있지 않다.

이혼 위자료 청구 제도도 유명무실해 축출이혼을 사전에 막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현재 법원이 인정하는 위자료의 상한은 5000만원 수준이다. 이는 일반적인 가정을 기준으로 해도 부정을 사전에 억제하거나 남은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금액이다. 정 회장의 부인 최씨가 법원에 청구한 위자료는 5억원이다. 법조계에서는 최씨가 청구한 위자료도 실제 재판에서는 훨씬 낮은 액수에서 결정될 것으로 전망한다.

◆‘파탄주의’ 도입 여론 떠보는 대법원

대법원은 이혼 사건에서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른바 ‘유책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사실상 혼인관계가 파탄 상태에 이르렀다면 이혼을 허용해야 한다(파탄주의)는 인식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법원도 최근 유책주의 유지와 파탄주의 채택에 관한 사회 인식을 조사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해 오는 6월 말쯤 결과를 보고받을 예정이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이 이혼 사건 판례를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변경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 소재 사립대 법학전문대학원 A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공고한 ‘이혼원인으로서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에 관한 실증적 연구’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A교수팀은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오는 6월20일쯤 연구를 마무리하고 결과를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A교수는 각종 학회나 정책 간담회 등에서 배우자 부양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전제로 파탄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래서 이번 연구 용역 결과도 파탄주의 도입 쪽에 방점이 찍힐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대법원도 이번 용역을 발주하면서 “유책주의 대법원 판결이 있은 후 5년이 경과했다”며 “이후 우리 사회의 변화와 시민사회 인식을 실증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증대했다”고 연구 배경을 설명했다. 또 연구 제안서에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에 대한 법리적, 법제적 검토에만 머무르지 않고 파탄주의 채택을 전제로 실증적 연구를 진행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A교수가 현행법 체계에서는 무책배우자에게만 가족 부양의 부담이 쏠리게 된다는 한계를 강하게 지적해온 만큼, 파탄주의 도입에 따른 보완책을 완비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A교수는 “연구 결과를 정해놓고 진행하지 않는다”며 “유책주의든 파탄주의든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법원에서도 파탄주의뿐 아니라 유책주의도 같이 다뤄 달라고 요청했다”며 “실증적 연구를 통해 국민들이 현재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핵심이니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도 “당장 파탄주의를 채택해 이혼의 자유를 확대하자는 것은 아니다”며 “국민들이 이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여론조사 등을 통해 확인하려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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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 배우자에 부양·양육비 지급 강제해야… 약자 보호 시급

‘바람난 배우자의 이혼 요구는 끝까지 들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 문제들이 닥친다. 피해를 줄이자니 이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무책 배우자가 유책 배우자의 일방적인 이혼 요구를 마주한 뒤 밟게 되는 ‘악순환의 굴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안전판, 즉 가족법에 이 부분이 ‘입법의 공백’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수용하지 않는 ‘유책주의’ 관점에서는 이혼 거부라는 맞대응이 가능하지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재산권 확보 등에서 불리한 형국이 펼쳐진다. 제도적 보호장치 없이 법원의 판결도 파탄주의(사실상 혼인이 파탄났다고 인정되면 이혼을 허락하는 관점)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책배우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전문가들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는 배우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가족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양·양육 문제 해결이 우선”

24일 법조계, 학계 등에 따르면 파탄주의를 도입한 다른 나라들도 이혼한 본처의 경제적 문제와 자녀 교육·양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영국의 경우 ‘부양료지급명령’과 ‘재산조정명령’ 제도를 통해 이혼 후에도 생활수준과 자녀의 이익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독일은 ‘잉여공동재산제’를 채택해 재산분할 후에도 직장이나 자산이 없는 배우자에 대한 상대 배우자의 부양 의무를 마련했고, 이혼 후 연금에 대해서도 분할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프랑스는 자녀의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가장 어린 자녀가 일정한 나이에 이를 때까지 무책 배우자에게 혼인주택을 임대하도록 하고 있다. 
국내는 최근에서야 ‘이혼 후 부양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양비 청구권 등을 인정해 재산분할 및 위자료와 별도로 유책 배우자로 하여금 이혼 후에도 일정 기간 생계비를 주도록 강제하자는 제도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동진 교수는 “서구 사회의 모델은 결혼으로 인해 일을 안 하게 되면 이혼 후 다시 취업하기가 어려우니 재취업까지는 버틸 수 있도록 부양비를 주는 개념”이라며 “우리는 아직 논의가 미흡한 초기 단계이고 방식과 기간, 부양비 지급 이행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녀양육비 지급 제도도 손봐야 한다. 법정에서 무책 배우자가 자녀양육비 청구소송에서 승소한들 판결문은 ‘종잇조각’에 불과한 실정이다. 구본창 배드파더스 대표는 “이혼 후 상대방 배우자가 양육비를 주지 않는 사례가 10건 중 8건꼴”이라며 “아직은 양육비를 주지 않더라도 30일 이내에서 구치소에 감치하는 게 고작이고 실제로 감치되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구 대표는 “이 때문에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하기 위해 일부러 양육비를 안 주고 괴롭히는 경우도 생긴다”면서 “이는 결국 법적, 제도적인 미비점이 원인인데 시급하게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양육비이행법이 개정돼 올해 중순부터는 양육비 지급을 거절하는 악성 채무자에 대해 출국금지·명단공개·형사처벌(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운전면허 정지 등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유책 배우자가 고의로 주소지를 다른 곳에 옮겨놓고 소장을 받지 않으면 감치 판결도 어려운 실정이다. 
◆유책에는 합당한 징벌 필요

약자를 중심으로 한 가족보호 대책과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유책 행위를 억제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다.

일찌감치 혼인에 파탄주의 관점을 도입한 서구 국가들도 관련 법에 ‘가혹조항’을 두는 등 축출이혼의 시도를 막고 있다. 가혹조항은 배우자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줘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될 경우, 법원은 이 조항에 따라 이혼을 불허할 수 있다. 파탄주의를 허용한다고 해서 유책 배우자에 대한 법적, 정서적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유명무실한 위자료 제도에 대한 지적도 높다. 위자료가 유책 배우자에게 징벌이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도 안 된다는 취지다. 우리 민법 제806조는 무책 배우자가 입은 정신적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법원에서 결정되는 위자료는 3000만∼5000만원 수준이다. 자산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정액 개념의 붕어빵 판결이다. 이혼청구 소송에서 유책 여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미국의 경우 유책 배우자의 경제력에 따라 위자료를 책정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막대한 위자료를 감수해야 한다. 무분별한 축출이혼을 예방하는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이 금지한 중혼(重婚)이 제약 없이 이뤄지는 점도 문제다. 일찍부터 파탄주의를 채택한 나라조차도 중혼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가 1975년 간통죄를 폐지하면서 중혼죄에 대해 구금 1년 및 벌금 4만5000유로 등 처벌조항을 마련한 바 있다. 물론 우리 민법도 ‘배우자가 있는 자는 다시 혼인하지 못한다’(제810조)는 조항이 있다. 가족관계등록 공무원이 혼인신고를 수리할 때 기존 혼인신고가 남아있는 경우 중복 신고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행정처리의 불편함을 제외하면 중혼에 따른 부담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이혼시장’이란 관점에서 보면, 남겨진 아내와 자녀들은 경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대변할 법률적 목소리가 크지 않다”며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파탄주의 도입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편”이라고 전했다.
◆이혼소송 판례 갱신 손놓은 가정법원들

이혼과 상속, 재산분할 등 가사사건을 다루는 가정법원들이 이혼소송 관련 주요 판결을 소개하지 않아 국민들의 알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일보가 전국 8개 가정법원 홈페이지의 ‘우리 법원 주요 판결’을 분석한 결과 최신 판례를 제공하고 있는 곳은 부산가정법원 1곳으로 나타났다. 부산가정법원은 이달 18일 최신 판결문을 업데이트해 게시했다. 반면 광주가정법원은 2019년, 서울가정법원과 대전가정법원은 각각 2018년 판결문을 공개한 뒤로 손을 놓고 있다.

수원가정법원과 울산가정법원 2곳은 홈페이지에 올린 판결문이 1건도 없었다. 울산가정법원과 수원가정법원은 각각 2018년 3월과 2019년 3월 개원했다. 이에 비해 대법원은 법원조직법 등에 따라 조사심의관실과 재판연구관실에서 공보할 판례를 선별하고 ‘판례공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린다. 판례공보에 오른 판결문은 ‘법원 홈페이지 관리·운영지침’ 제9조에 따라 대법원 홈페이지에도 게시된다.
하지만 하급법원인 가정법원은 판결문을 언제, 어떻게 정해 공보할지에 대한 내부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법원 홈페이지 관리·운영지침 별표1’을 보면, 주요 판결 공개에 관한 담당부서는 ‘각급 법원’이라고 정해둔 것이 전부다.

한 가정법원 관계자는 “국민들의 알권리 확대 차원에서 2006년부터 각 법원 홈페이지 ‘우리 법원 주요 판결’ 메뉴를 통해 판결문을 공개한다”면서 “다만 통일된 업무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통은 월초에 공보판사가 홈페이지에 게시할 판결문을 정하고 이를 업데이트하는 식으로 업무가 진행된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관계자는 “법원홍보업무에관한내규에 판례공보 관련 원론적인 규정은 있는데 각급 법원 업무까지 구체화된 것은 아니다”면서 “각 법원 사정에 따라 판결문 공보 업무에 다소 편차가 있다”고 설명했다. 가사 판결문은 민사, 형사 사건에 비해 사생활 보호 측면이 강한 점도 가정법원이 판결문 공개에 소극적인 이유다. 이에 대해 한 이혼사건 변호사는 “최근 하급심에서 가사사건 판결 흐름이 변하고 있는 만큼 주요 판결은 개인정보를 익명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판결 정보를 신속히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취재팀=조현일·박현준·김청윤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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