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지역 의병, 여성독립운동가 업적 재조명

최현구 기자 2021. 2. 2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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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윤봉길의사기념관서..4월 30일까지 특별기획전 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살림 도맡은 정정화 선생의 인생 역경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정정화 선생이 유년기를 보냈던 장소에 대해 친손녀인 김선현씨가 설명하고 있다.(윤봉길의사 기념관 제공)© 뉴스1

(예산=뉴스1) 최현구 기자 = 102주년 삼일절을 앞두고 내포지역 의병들과 여성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이야기들로 꾸며진 특별기획전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기획전에는 홍주의병들의 당시 상황을 담은 이야기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충남 예산군 공립박물관인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는 지난해 12월 19일부터 지난 19일까지 ‘내포지역의 항일운동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당초 19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휴일 없이 4월 30일까지 기간이 연장됐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정정화 선생의 친손녀인 김선현 씨가 특별기획전에서 직접 전시해설을 진행해 기획전에 대한 높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은 백범 김구 선생이 수당 정정화 선생에게 써준 휘호인 ‘춘풍대아능용물 추수문장불염진(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이다.

다시 말해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뜻의 대련 작품으로 국내 문화예술계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수당 정정화(修堂 鄭靖和, 1900~1991) 왼쪽부터 1920년대, 1940년대, 1980년대 후반의 모습.(동농 김가진 가문 제공) © 뉴스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머니, 수당 정정화(鄭靖和) 선생 며칠전 우연한 계기로 <장강일기>라는 한 항일여성독립운동가의 회고록을 접하게 됐다.

코로나 사태로 올해는 유독 삼일절이 쓸쓸하게 느껴져 이 한권의 책과 기획전을 통해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정정화 선생은 ‘한국의 잔다르크’,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여성 독립투사’, ‘임시정부의 맏며느리’ 등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려질 만큼 일생동안 임시정부의 산증인으로 살아오다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수당 정정화 선생의 삶을 되새겨본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한 많은 여인 정정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의 이름은 빼놓을수 없을 정도로 역할이 컸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의 일평생은 생전에 구술한 회고록 <장강일기>를 통해 재조명 되고 있다.

‘전쟁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수송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부산을 통해 독립된 조국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났을 때 1947년 세 가족/2006년 10월 1일 성엄 김의한 묘역(북한 평양 재북 인사 묘역)을 찾은 아들 김자동 선생과 수당 정정화 영정.(동농 김가진 가문 제공)© 뉴스1

◇여성 독립투사 정정화의 일대기

1900년 8월 수원유수 정주영과 이인화의 3녀로 서울에서 출생한 정정화(본명은 정묘희)는 6세때 부친이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로 낙향하면서 예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대술면 시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는 친정아버지에게 독립자금을 꾸준히 받아 간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할아버지(정낙용)의 권유로 성엄 김의한과 11세때 혼인했다.

정정화 선생은 1920년 상해로 망명해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려운 시절 임시정부 요원들을 보살피는 등 20여년 간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1919년 10월은 정정화 선생의 앞길을 바꾸어 놓았다.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인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과 남편인 성엄 김의한의 망명이 정정화 선생에게 상해 망명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21세 되던 해 이미 중국 상해에 망명해 있던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시작한 그는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 밀사의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밀령을 띠고 지하 조직을 통해 국내에 잠입, 은밀히 밀령을 수행한다.

1차 국내 잠입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드는 동안 이십 대 꽃다운 나이를 모두 보낸 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상해 프랑스 조계를 탈출, 망명정부를 뒷바라지하면서 해방되기까지 10여 년 동안 대륙의 피난길을 떠돌게 된다.

중경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으며 이미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아낙네가 된 정정화 선생은 전쟁 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에 발을 디디었으나 다시 6⋅25를 겪으면서 남편이 납북되고 가족이 흩어지는 와중에서 부역죄로 구속 기소되어 투옥되고 만다.

40년 세월이 흘러 정 선생이 겪어온 100년 남짓 쓰라린 세월의 모든 것을 비로소 증언했으며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1991년 91세로 생을 마감하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chg5630@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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