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명에 49억원 중고 사기..고교 동창 셋의 빗나간 동업

오재용 기자 2021. 2. 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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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블랙박스] 범죄 수익금 비트코인 등으로 환전..필리핀 현지서 부동산 매입 등 호화생활
/조선DB

2014년 10월30일 필리핀 마카티시(市). 고등학교 동창 사이인 강모(39)씨와 A(39)씨, B(39)씨 등 3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인터넷 중고물품 거래를 이용해 사기 행각을 벌이기로 모의했다.

인터넷 물품 거래 사이트인 네이버 카페 등에 허위로 물품 판매 글을 올리고, 이 글에 속아 연락한 피해자들에게 물품 판매 대금을 ‘대포 계좌’로 받고, 물건은 실제로 보내지 않는 수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필리핀 현지서 39명으로 범죄단체 꾸려

강씨 등은 필리핀 현지에 사무실과 숙소를 마련해 범행을 준비했다. 한국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노트북 컴퓨터와 프린터, 휴대전화 단말기, 유심카드 등을 준비하고 인터넷을 설치했다. 이들은 인터넷 접속 주소(IP)를 국내인 것처럼 속일 수 있는 ‘가상 사설망’(VPN·Virtual Private Network)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인터넷 전화번호와 휴대전화 번호 간 착신 전환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 문자 메시지 웹 발신 프로그램도 설치했다.

이들은 또 인터넷 물품 거래 사이트에 허위 글을 올리고, 판매 대금을 송금하도록 유인하는 ‘판매책’과 물품 대금을 받을 대포 계좌와 차명 계좌를 관리할 ‘장’을 모집했다. 차명 계좌는 인터넷 사이트에 ‘쇼핑몰 관리 등을 할 재택 근무자를 모집한다’고 허위로 광고한 뒤 이를 믿고 연락을 해온 사람들의 계좌 번호를 수집하는 수법을 썼다.

강씨와 고교 동창생 2명은 관리책임자인 ‘사장단’으로 범행을 주도했다. 범행 기획에서부터 지시했고, ‘판매책’과 ‘장’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포 계좌와 차명 계좌로 입금된 범죄 수익금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같은 암호 화폐를 구입해 최종적으로 필리핀 화폐로 환전하거나 필리핀 현지 환전소를 통해 한국 원화로 환전하는 자금 세탁도 직접 담당했다.

이들은 범행에 가담할 35여 명을 모집하고 ‘판매책’, ‘장’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범행 시간도 한국의 일과 시간인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에 맞췄다. 한국과 1시간 시차가 나는 점을 감안해 필리핀 현지에서는 평일 오전 8시까지 출근해 오후 5시까지 범행에 나서는 치밀함을 보였다.

조직원들끼리는 서로 별명만 사용하게 했다. 사무실에서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하거나 범행에 사용하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을 금지했다. 외출과 휴가를 갈 때에는 사장단에게 미리 보고하거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여권도 걷어 한꺼번에 관리했다. 체류 기간을 연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고물품 사기단 조직도./제주경찰청

◇가짜 중고 매물 인터넷에 올리고 입금하면 연락 끊어

이들의 사기 행각은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32명의 판매책은 중고나라, 골마켓, 번개장터 등 인터넷 물품 거래 사이트와 블로그 등에 가구 매장, 골프 매장 등을 사칭해 냉장고와 TV, 휴대전화, 상품권 등을 판매한다는 글을 게시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현혹된 피해자들이 연락하면 카카오톡으로 유인해 대화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위조된 사업자 등록증과 신분증을 내세워 피해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가짜 명의 가게가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포털 사이트에 업체를 등록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가짜 명함도 만들었다.

판매하겠다는 물품은 전자 기기에서 명품 시계, 상품권, 여행권, 골드바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가격도 1개당 4만5000원에서 최대 3120만원까지 광범위했다. 이들은 소비자가 물건을 주문해 돈을 입금하면, ‘주문 폭주’ ‘택배에 문제가 있다’는 등 핑계를 대며 물건을 보내지 않았다.

이들은 실제 통장 주인을 섭외해 돈세탁에 활용했다. 대부분 가정주부로 조사된 통장 주인들은 자신들이 재택근무 아르바이트 형태로 정당한 일을 한 것으로 착각했다.

통장 주인들이 입금된 돈을 강씨 조직에 넘기면 이들은 가상 화폐와 상품권 등으로 여러 차례 거래하는 이른바 ‘믹싱’ 작업을 벌였다. 외국 거래소까지 동원해 무려 20번의 돈세탁을 거치기도 했다.

이 같은 수법으로 이들은 2020년 1월까지 6년에 걸쳐 5000여명을 상대로 49억원대를 챙겼다. 최종 수익금의 80%를 사장단 3명이 챙겼고, 나머지 20%를 모집책과 판매책이 나눴다. 수습은 한 달에 300만원을 받았지만 3개월 후부터는 수입금의 10~20%를 인센티브로 챙겼다. 경찰이 이들을 검거할 당시 사장단은 벤츠 차량을 타고 필리핀에 부동산까지 사들이는 등 호화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현금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온라인 중고사이트 사기단과 소비자가 나눈 대화내용. /제주경찰청

◇신고하면 음식배달 테러·욕설 등으로 보복

이들 일당은 피해자가 추적을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면 곧바로 보복에 나섰다. 이미 확보한 피해자의 이름과 연락처, 집 주소를 활용해 ‘2차 괴롭힘’을 시작했다. ‘배달 테러’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피해자 거주지 주변에 있는 피자 가게, 치킨집, 중국 음식점 등에 전화해 수십만 원 상당의 음식을 피해자 집으로 배달시켰다. 애꿎은 배달 업체가 피해를 떠안았다. 환불을 요구하는 일부 피해자에게 나체 사진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 중에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쌈짓돈을 고스란히 빼앗긴 청년, 노부모를 위한 효도 여행 상품권을 구매한 자녀도 있었다.

제주경찰청 관계자는 “피의자들이 외국에 거주하고 돈세탁도 여러 차례 거쳐 추적이 어려웠다”며 “2019년 1월 첩보를 입수해 2년에 걸쳐 이들을 추적하고 조직원을 검거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보복 테러로 피해자들을 협박해 그동안 장기간에 걸친 범행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제주지법은 지난 18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와 범죄 단체 조직, 협박 등 혐의로 기소된 강모(38)씨 등 29명에 대해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주범인 강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19명에 대해서는 범행 기간과 가담 정도에 따라 징역 1년6개월에서 최대 10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10명에 대해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에서 최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300시간의 사회봉사 활동을 명령했다.

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강씨는 법정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범죄 단체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조직된 범죄 단체에 가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해당 조직이 범죄단체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현재 A씨와 B씨 사장단 2명 등 10여 명이 해외에서 도피 중이다. 경찰은 이들에 대해 인터폴에 적색 수배를 요청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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