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한 어머니는 왜 아버지에게 오지 말라고 할까

한겨레 2021. 2. 2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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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토요판] 조한진희의 잘 아플 권리
④ 돌봄의 성별
성별에 따라 너무 다른 현실의 돌봄
암환자 여성일 때 이혼율 3~4배 높고 정서적으로도 남편의 지원을 덜 받아
인간의 의존성은 '특수' 아닌 '보편'
'돌봄노동 무임승차' 특권 던지고
돌봄 성별성 깨는 일상의 혁명 기대
암환자 돌봄 관련 조사를 보면, 남편이 아내로부터 정서적 돌봄을 지원받는 비율이 84%인 반면, 아내는 남편에 의한 지원이 32.9%에 그쳤다. 아내는 남편보다 자식(딸 28.5%, 아들 17.7%)에게 정서적 지원을 받은 비율이 더 높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제발, 안 오는 게 도와주는 거야.”

몇년 전 어머니가 가벼운 뇌졸중 증세로 입원하셨다. 팔순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양복을 입고 어머니 병실로 ‘출근’하셨다. 아내가 아픈데 집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병실에 캠핑의자를 갖다 놓고, 반듯하게 양복을 입은 채 주로 신문이나 책을 읽으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믹스커피를 한잔 마시면 기분이 좋겠다거나, 퇴원하면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자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간병인은 어머니를 챙겼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식이나 책을 빠짐없이 챙기는 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급기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제발 병원에 오지 말라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화내는 어머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서운해하셨다.

성별에 따른 돌봄력의 차이

정도는 다르지만, 적지 않은 기혼여성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말한다. 남편이 아픈 자신을 돌봐주려고 하는데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 말이다. 그나마 어떤 여성들은 어떻게든 아픈 아내를 돌봐주려는 노력을 가상히 여길지도 모른다. 가족 안에서 돌봄은 아내·며느리·딸의 역할로 성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돌봄을 자신의 역할로 여기지 않다 보니, 돌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남편에게 아이를 보고(care) 있으라고 했더니, 우는 아이를 계속 빤히 보고(see)만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실화인 경우를 증언한다.

그나마 이런 현실은 다행이고, 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간병인들 사이에는 “남편이 병석에 오래 누워 있으면 아내가 골병들고, 아내가 오래 누워 있으면 남편이 바람난다”는 식의 격언이 전해진다. 실제 암환자 이혼율을 보면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에 비해 이혼율이 3~4배가량 높다.아픈 아내를 두고 바람피우는 것도 문제지만, 아픈 아내를 전혀 간병하지 않는 것도 문제인데 이는 크게 문제화되지 않는다. 반면 아내가 아픈 남편을 전혀 간병하지 않는 경우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문제가 되고, 바람을 피운다면 이에 대한 비난은 남편의 바람에 비해 훨씬 격렬하다.

돌봄으로 다시 돌아와서, 암환자의 돌봄 비율을 보자. 암환자들의 간병과 관련한 통계를 보면, 남편은 절대다수가 아내에게 간병받지만 아내의 경우 남편에 의한 간병 비율이 낮고 셀프간병 비율이 높다. 2019년 삼성서울병원과 국립암센터 등의 공동연구 결과를 보면, 암환자가 남편일 때는 아내가 신체적으로 돌봐주는 경우가 86.1%인 반면, 아내가 암환자일 때는 남편에 의한 지원이 36.1%에 불과했다. 정서적 돌봄에서도 남편이 아내로부터 지원받는 비율이 84%인 반면, 그 반대는 32.9%에 그쳤다. 돌봄의 성별화, 비민주성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아픈 사람들을 인터뷰했을 때 성별에 따라 두드러지는 차이는 남성은 외로움, 여성은 돌봄이었다. 여성은 아파도 돌봄노동을 쉴 수 없거나 아픈데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을 주로 하소연했다. 병원과 요양원에 입원한 경험에 대해, 때 되면 밥 나오고 집안일이나 돌봄노동을 안 해도 되는 ‘호사’, ‘사치’, ‘휴가’ 같은 단어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등하고 정의로운돌봄민주주의

돌봄연구의 권위자인 조앤 트론토는 돌봄의 성별화로 인해 여성은 돌봄에 예속돼온 반면, 남성은 돌봄에 대한 무임승차 특권을 누려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더해, 남성생계부양자 모델 안에서 가족 내 돌봄은 다시 해석돼야 한다고 본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 와서 어머니가 집에서 살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돌봄노동을 수행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올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기업이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기업을 먹여 살린다는 인식의 전환처럼 돌봄에 대한 사유 또한 민주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들은 돌봄 자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돌봄윤리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 미국 철학자 에바 키테이는 아동, 노인, 아픈 사람, 장애인 등 취약한 일부 사람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며, 인간이 비의존적 존재라는 것은 조작된 신화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인간의 의존성은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고 ‘정상’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돌봄이 필요하며 생애주기나 개인의 상태에 따라 돌봄이 필요한 내용과 정도가 평생에 걸쳐 조금씩 변화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돌봄으로 빚어진 생명체다. 인간이 모태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 음식과 공기가 있어도 돌봄이 없었다면 생존은 불가능했다. 인간이 타인의 도움 없이 살아가는 게 독립이라는 것은 ‘왜곡’이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 독립적인 강한 자신이 되어 각자도생하라는 것은 어디서 온 메시지일까? 이전 원고에서 제시했던 ‘아픈 몸’이 기본값인 사회, 돌봄이 공기처럼 흐르는 사회라는 것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는 사회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과 돌봄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사람을 나누는 이분법을 벗어날 때,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돌봄이 필요하며, 필요한 돌봄의 형태와 정도가 다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돌봄민주주의 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돌봄이 사회정치적 의제로 각광받고 있으며, 주로 돌봄의 사회화 관련 논의가 강화되고 있다. 돌봄의 사회화가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돌봄의 성별성이 깨지지 않는 한 돌봄의 사회화 또한 한계가 명확하다. 그런 점에서 돌봄의 성별성이 깨질 수 있는 일상의 혁명을 기대한다. 일상이라는 것은 지배 전략이 가장 세밀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저항적 실천이 적극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이다. 미시권력의 행사와 그에 저항하는 개인이 역사를 쓰고 실천하는 장소인 일상에서, ‘돌봄의 비민주성’을 해체하는 ‘혁명’이 이제는 발화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나는 기울어진 성별 운동장에서 기존의 남성성으로부터 이탈하겠다고 결심하는 이들을 주목하고 있다. 성차별의 주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남성들, 성폭력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일상의 작은 행위도 성찰하겠다고 선언하는 남성들 말이다. 이들이 성차별과 성폭력 등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넘어서, 돌봄노동에 무임승차하는 특권을 벗어던지겠다고 한다면 어떤 변화가 시작될까. 한국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이 깨진 지 오래됐고 맞벌이 부부가 증가했음에도 성역할이 강고한 탓인지 외벌이와 맞벌이 남편의 가사노동 시간이 5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를 뚫고 돌봄노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몸으로 남성들이 ‘진화’한다면, 돌봄의 민주화는 가속화할 것이다. 이들이 돌봄민주주의를 함께 완성해나가는 주요한 한 시민주체가 되리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질병과 돌봄위기 담론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위 고독사(무연사)를 보자. 고독사의 경우 대다수 통계에서 남성 비율이 70~80%로 압도적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와 달리 50대 남성의 고독사 비율이 높다. 이를 연구한 보고서들을 보면, 대개 남성들이 조기퇴직 후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고립되는 부분이 많다고 진단한다. 은퇴 뒤 직장 내 관계가 끊어지면 관계의 빈곤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족 돌봄 경험의 부족으로 정서적 유대를 형성할 계기가 적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고독사를 가족의 책임으로 연결지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책임은 더욱 강조돼야 한다. 분명한 건 돌봄의 성별성을 해체하는 것은 남성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확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돌봄은 귀찮은 것, 피하고 싶은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실 인간은 돌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고 타인에 대한 연대감이 깊어지기도 한다. 만약 인간됨이라는 것을 규정할 수 있다면, 인간은 돌보는 행위를 통해 좀 더 인간됨에 가까워지기도 할 것이다. 가족뿐 아니라 타인을 돌보는 경험과 역량을 축적하지 못한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반면 돌봄에 익숙한 사람은 가족이든 이웃이든 환대받는 사람이 될 확률도 커진다. 민주주의는 결국 인간들이 서로 의존하고 의존받는 관계에 대한 문제를 빼고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돌봄의 민주주의 또한 모두의 평등과 정의를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 여성, 평화, 장애 관련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탈식민페미니스트. 국제 현장 연대 활동에서 건강이 손상된 뒤 투병 경험을 정치사회적으로 접근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다. 공저로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비거닝> <포스트 코로나 사회>가 있다. 신생 단체 다른몸들에서 활동 중이다. 아픈 몸을 둘러싼 사회·경제·정치적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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