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생명권 vs 여성 결정권.. 그 이면엔 '정치적 이해관계' [심층기획-지구촌 낙태 찬반 논란]

박진영 2021. 2. 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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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연방대법, 1973년 '여성 권리'로 인정
앨라배마 등 10여개 주는 제한법 통과
테네시, 남성에 낙태 거부권 추진 시끌
민주·공화당 우세 州별로 '엇갈린 행보'
온두라스는 합법화 못하도록 법안 강화
폴란드, 기형 태아 낙태 위헌에 갈등 확산
泰, 임신 12주까지 허용.. 낙태죄는 유지
각국, 정치적 환경 변화 맞물려 논쟁 계속
‘태아 생명권이냐,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냐.’

낙태를 둘러싼 해묵은 주제다. 새해 벽두부터 이 문제로 지구촌 곳곳이 다시 들끓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낙태를 합법화하는가 하면 폴란드와 온두라스는 낙태 금지를 강화했다.

미국에선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권리뿐 아니라 태아 아버지의 권리까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 일련의 움직임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또는 환경 변화와 맞물려 있다.

◆美 민주·공화 우세주별로 정반대 움직임 ‘뚜렷’

미국은 ‘낙태는 여성의 헌법적 권리’라고 인정한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 대(對) 웨이드’ 판결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주법에 우선하는 연방법은 낙태를 허용한다. 다만 최근 민주당 우세주인지 공화당 우세주인지에 따라 주별로 엇갈린 행보를 보이고 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20일(현지시간) 민주당 주도의 뉴멕시코주 하원은 상원에 이어 대부분 낙태를 금지하는 휴면 상태 법률의 폐지를 의결했다. 1969년 제정된 이 법은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무력화됐다. 경찰에 신고된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등에 한해 전문 병원 이사회의 허가를 받은 낙태만 허용한다.
미국의 낙태 반대 활동가들이 지난 1월29일 워싱턴 연방대법원 밖에서 연례 낙태 반대 집회인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Life)을 벌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셸 루한 그리셤 뉴멕시코 주지사는 “연방 차원의 불확실성으로 뉴멕시코는 여성의 권리와 건강관리, 낙태에 대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경우, 효력을 다시 발휘하지 못하도록 싹을 자른 것이다. 뉴멕시코주는 낙태 제한이 거의 없다.

같은 날 대부분 낙태를 금지하려던 공화당 주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움직임엔 제동이 걸렸다. 주 연방법원은 낙태 찬성 단체의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사우스캐롤라이나 태아 심장박동 및 낙태로부터의 보호’란 낙태 제한법에 대해 최소 14일간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틀 전 헨리 맥매스터 주지사가 법안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반대에 가로막힌 것이다.

앞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하원은 수년간 시도 끝에 낙태 제한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들은 태아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기 위한 초음파 검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감지되면 강간·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 아니고 임신부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낙태 시술을 할 수 없다. 이를 어기면 중죄로 기소돼 2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 1만달러(약 1104만원)에 처해질 수 있다. 불법 낙태를 한 여성을 처벌하진 않는다.

이 법은 앨라배마주를 필두로 다른 12개 주가 앞서 통과시킨 낙태 제한법들과 유사하다. 이들 법을 통틀어 ‘심장박동법’이라 한다. 다만 모두 법 시행에 반대해 제기된 소송에 효력이 정지돼 있다. 반대론자들은 태아 심장박동이 임신 6주 정도에 감지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임신 6주엔 임신부가 임신 사실을 알기 어렵고, 낙태를 할지 말지 생각할 시간도 충분히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수 우위 연방대법원 ‘변수’… ‘태아 아버지 권리’ 주장도

이 같은 미국 내 낙태 제한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수 성향 대법관 3명을 임명하며 6대 3으로 보수 우위가 된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길 바란다. 주법인 낙태 제한법들은 연방대법원 판결이 뒤집히면 효력을 얻는다.

제이슨 레이퍼트 아칸소주 상원의원(공화당)은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무효화해 아칸소가 태아 생명을 보호하도록 허용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칸소주 상원 공중보건복지노동위원회는 응급 상황 시 임신부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인 77%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지하지만 미 전역의 공화당 의원들은 낙태권을 제한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웬디 데이비스 전 텍사스주 상원의원(민주당)은 “연방대법원 구성에 낙태 반대론자들이 대담해졌다”며 “정치인들은 여성과 그 가족의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비판했다.

테네시주에선 임신부 동의 없이 원인 제공자인 남성에게 낙태 거부권을 주는 법안까지 등장했다. 법원에 낙태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방식이다. 임신부가 법원 명령에 불응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지난 17일 마크 포디 주 상원의원(공화당)은 “한 주민이 ‘현행법상 태아 아버지는 낙태에 대한 발언권이 없다’고 우려해 법안을 제출했다”며 “태아 아버지가 태아에 대한 결정을 내릴 권리를 보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법안은 즉각 거센 비판에 휩싸였다. 미국시민자유연합(ACLU) 테네시 지부의 헤디 바인베르크는 “강간이나 근친상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강간범이 피해자가 임신을 끝내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포디 의원은 “강간범들이 낙태를 막기 위해 법정에 자진 출두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정부가 되살렸던 일명 ‘멕시코시티 정책’을 지난달 말 철회하며 낙태 찬성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에 따라 낙태 관련 국제 비정부기구(NGO)들은 미국 지원을 다시 받게 됐다.
폴란드의 낙태 찬성 활동가들이 지난 6일 중부 로지에서 합법적 낙태를 위한 청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폴란드는 지난해 ‘기형 태아 낙태는 위헌’이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낙태 제한이 더 강화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폴란드·온두라스 낙태 금지 ‘강화’… 태국은 임신 12주까지 허용

미국만 낙태 문제로 시끄러운 건 아니다. 폴란드에선 지난해 10월 ‘다운증후군 등 기형 태아 낙태는 위헌’이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극보수 단체 등의 정치적 지지에 대한 보상”이란 비판이 나왔다.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지난여름 득표율 51.2%로 재선에 간신히 성공했다.

폴란드 헌재 결정으로 강간·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나 임신이 임신부 생명이나 건강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낙태가 허용된다.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여성 파업(Women’s Strike)이란 단체는 “지난해 말 아르헨티나 자매들은 15년간 10차례 시도 끝에 낙태 합법화에 성공했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낙태를 전면 금지한 몇 안 되는 국가인 온두라스는 향후 낙태 합법화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낙태 금지를 규정한 헌법을 개정하려면 기존의 의회 3분의 2 이상이 아닌 4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내용의 법안이 지난달 여당 주도로 의회를 통과했다.

이를 두고 미 CNN방송은 “온두라스에 2021년은 대선과 총선이 있는 ‘선거의 해’”라며 “역사적으로 낙태가 온두라스인들에게 결정적인 투표 요인은 아니지만 최근 ‘녹색 물결’이란 남미 지역 낙태 합법화 운동으로 민감한 문제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영국 북아일랜드 낙태법에도 변화 기류가 감지된다.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은 지난 16일 치명적 장애가 아닌 태아의 낙태를 금지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다. 북아일랜드에선 임신 12주까지 모든 낙태를 허용한다. 다만 태아가 심각한 장애를 겪을 수 있는 위험이 있을 땐 기간 제한이 없다.

반면 태국 의회는 지난달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초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른 것이다. 최고 징역형이 3년에서 6개월로 줄어들 뿐, 낙태죄는 유지된다. 미 뉴욕에 본부를 둔 여성 인권 단체 재생산권리센터(CRR)의 아시아 지부 법률 고문인 지한 제이컵은 “긍정적 발전”이라면서도 “모든 임신부가 낙태에 접근할 수 있기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 이웃 국가 칠레는 임신 14주 이내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호주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하원도 임신 후기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법안을 논의 중이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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