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폭력을 대체한 학폭, 다음은?
적지 않은 사람이 영남이란 단어에 보수 혹은 극우를 떠올린다. 그러나 보수와 극우만이 영남의 정체성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내내 대구는 매우 불온한 '야당의 도시'였고 2.28 시위는 4.19 혁명의 가장 이른 불꽃에 해당했다.
유신 말기 타오른 부산과 마산의 시위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품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진보정권에서 두 명의 대통령이 부산 출신이며 진보 진영에서 가장 유명한 논객은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니 영남이 보수화한 1980년대 이후에도 '영남은 보수다' 혹은 '대구는 극우다' 같은 획일화는 옳지 않다.
아랍과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아랍국가 대부분에서 이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이슬람이 아랍 전체를 대표하는 정체성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건국할 무렵만 해도 '팔레스타인 성지'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이 존재했고 그들 대부분은 이스라엘 건국 후 박해와 혼란을 피하려고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시리아와 이집트에는 여전히 전체 인구의 10~20%를 헤아리는 기독교인과 그들만의 독특한 종파가 건재하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후 중동에서 신생국가가 본격적으로 탄생할 때, 이런 아랍 기독교인은 아랍과 이슬람을 동일시하는 흐름에 반발하여 세속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에 투신했다. 그리하여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힘을 발휘한 바트당, 이집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얻은 나세르주의에는 아랍 기독교인의 참여가 컸다. 바트당의 창립자이자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를 아우르는 '아랍공화국'을 꿈꾼 미첼 아플라크도 시리아 출신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바트당과 나세르주의는 변질하여 이집트의 무바라크,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와 바샤르 알 아사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의 권력기반으로 전락한다.
흥미롭게도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무바라크와 알 아사드 부자 같은 독재자는 '소수파를 보호하는 세속주의 통치자'를 자처하며 자신이 사라지면 이슬람 극단주의를 통제할 수 없어 한층 끔찍한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실제로 '아랍의 봄'을 맞이하여 이집트에서 군부독재가 붕괴하고 시리아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궁지에 몰리자 정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힘을 얻어 '차라리 옛날의 독재가 낫다'고 한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모두를 골고루 찍어 누르던 '독재정권의 폭력'이 사라지자 '취약한 소수파'에 집중하여 괴롭히는 '새로운 작은 폭력'이 나타나 '폭력의 공백'을 채웠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시리아와 이집트에 국한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학교폭력'이 그 대표다.
1990년대 중반, 그러니까 'IMF사태' 이전에도 초중고를 구분하지 않고 학교는 폭력이 일상화한 공간에 해당했다. 다만 폭력 대부분은 교사의 폭력, 틀림없이 합법은 아니나 실질적으로는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는 '기묘한 정당성을 지닌 폭력'이었다. 영화 '친구'의 '아버지 뭐 하시노?' 같은 장면은 실제로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비교하면 '미화한 장난'에 불과하다. 그 무렵에는 사소한 이유, 혹은 '너는 불량하고 공부를 못하니 맞아야 한다' 같은 이유만으로도 교사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육군의 장교'를 떠 올리게 하는 교사도 많았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육군은 지독한 체벌로 유명했다. 정신력을 심어준다, 군기를 바로 세운다 같은 명분으로 가혹한 구타를 일상화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문화는 한국의 학교, 운동, 군대에도 이어졌다)
다만 그런 '교사의 과도한 폭력'이 이른바 '일진의 폭력'을 억눌렀다. 그 무렵에도 일진이 있고 '짱' 혹은 '대가리'라 불리는 우두머리가 폭력서클을 통솔했으나 교사의 폭력에 눌려 동료 학생을 효과적으로 착취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에 살고 '우등생도 우등생의 세계'에 있으며 '평범한 학생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그 경계를 넘어 착취하고 괴롭히는 행동 대부분은 교사의 가혹한 폭력이 제압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여러 개선으로 교사가 폭력을 기반으로 한 권위를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당연하고 환영할 일이 틀림없으나 안타깝게도 '교사의 폭력'이 남긴 '폭력의 공백'을 다른 긍정적인 요소로 채우지 못했다. 그러자 '일진의 폭력'이 그 공백을 빠르게 채웠다. 그 결과 경계가 무너져서 일진이 일진의 세상에 머무르지 않고 동료 학생 가운데 취약한 아이부터 착취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IMF사태 이전에 초중고를 졸업한 기성세대는 오늘의 학교폭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나도 학창 시절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이유도 그들은 오늘의 학교폭력처럼 착취적이고 집요한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폭력이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몇몇 개인을 '일벌백계'로 처벌하는 것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교사의 폭력이 모두를 골고루 억압하는 상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 애초에 교사의 폭력을 제거할 때, 그 폭력의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계획이 필요했으니 지금이라도 '일진의 폭력'을 학교에서 제거하고 그 공백을 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에디터 코메디닷컴 (kormedimd@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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