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50쇄' 박준 "누구나 시적인 것이 필요한 순간은 있다" [커버스토리]

김민아 선임기자 2021. 2. 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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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박준은 문학적 평가와 대중적 인기를 함께 거머쥔 드문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최근 50쇄를 찍었다. 밀레니얼세대 시인으로서는 처음이다. 박준은 “부끄럽고 감사하다”면서 “스스로 문학적 갱신에 힘쓸 것”이라고 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출판사 편집자·라디오 진행 겸업
10대부터 20~30대 팬층도 두꺼워
4대강·세월호 사회적 발언도 적극
“시인 아니라 시민으로서 목소리”
“항상 ‘시인 정체성’ 갖고 살 순 없어
내면·작품 앞에만 시인이면 충분”

박준(38)은 하나의 ‘현상’이다. 박준으로 인해 처음 시를 읽고, 처음 시집을 샀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지난달 50쇄를 찍었다. 16만부다.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2018)도 8쇄, 7만부를 넘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2017)은 20만부를 돌파했다.

평단에선 외려 대중의 열광이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릴까 염려한다. 두 번째 시집에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예외적인 성공이 그의 시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가로막는 일이 될까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고백했다. “팔리는 책만 따라 읽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팔리는 책이라면 무조건 낮춰 보는 것 역시 경박한 일”이라며 “그런 협량한 선입견 없이 박준의 시를 읽으면 그의 시가 갖춘 미덕이 눈에 더 넓게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2008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박준은 첫 시집으로 신동엽문학상을, 두 번째 시집으로 박재삼문학상과 편운문학상을 받았다.

‘문단의 아이돌’이란 평을 들으면 어떤 마음일까. 박준은 “부끄러움과 감사한 마음이 같이 있다. 피하고 싶지만, 지금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말들이 되어서…”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곤 덧붙였다. “바코드가 붙은 시집은 상품이죠, 하지만 시집을 펼치면 안에 있는 작품은 상품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 시집이 첫 시집보다 더 많이 나갈 수도 없고, 더 나가서도 안 되겠지만, 문학적 가치는 더 있었으면 해요. 스스로를 갱신하자고 늘 다짐합니다.”

박준의 시는 특히 10대 청소년부터 20~30대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는 ‘보편성의 경험’으로 설명했다. “제 시는, 동시대 쓰여지는 다른 시들에 비해 조금은 덜 개인적이고, 조금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나 싶어요. 나도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럴 때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일종의 ‘실패기’라는 의미에서 보편성이죠. 어찌 보면 저는 과거지향적인 사람 같기도 해요. 늘 새로운 것보다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잖아요. AI나 화상통화가 등장하고…. 하지만 발전된 기술로 무엇을 한다고 한들,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준 시인의 시집들.
“너는 금속 세공사의 아들이었고 너는 아파트 수위의 아들, 나는 15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이었으므로 또 새봄이 온 데다 공업고에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꿔야 했다”

(‘잠들지 않는 숲’)

“사우나 앞에서 봉지에 녹아 붙은 초코파이를 들고 바라본 연신내의 저녁은 목욕탕 같았습니다 길의 주름마다 어둠이 불어 있고 그 어둠을 밀어내다 배가 고파졌습니다, 자주 벌거벗었습니다”

(‘희망소비자가격’)

시는 어렵다, 시가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박준은 “누구나 매일 일상에 시가 놓일 필요는 없지만, 누구나 시적인 것이 필요한 순간은 있다”고 말한다. “내 감정과 사유들이 정리되지 않을 때, 그 잘 잡히지 않는 것들을 명문화하는 것, 그게 시의 기능이죠. 시는 시대로, 시답게 존재하고 있으면 됩니다. 여러 시인들이 자신이 쓸 수 있는 좋은 시를 써서, 누군가 손을 뻗어 시집을 펼쳤을 때 시들이 존재한다면, 절망적인 일은 아닐 겁니다.”

박준은 출판사 창비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매일 출근하지는 않고 재택근무를 병행하지만, 여전히 직장인이다. 심야에 2시간 동안 라디오(CBS 음악FM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 진행도 맡고 있다. 대본도 직접 쓴다.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제가 게을러요. 엄청. 사실 게으른 시간을 찾기 위해서 일을 집약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빨리 하고 놀아야지, 빨리 마치고 술 마셔야지… 식으로 스스로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는 거죠.”

라디오 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3시쯤이다. 뇌가 활성화된 상태여서 바로 잠들지 못한다. 그때 시를 쓴다. 새벽 5시까지 두 시간 정도 매달린다. 완성형의 시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메모를 한다.

시 쓰기는 노동일까. “개인적으로는 시 쓰기가 노동처럼 여겨지진 않아요. 자발적으로 쓰는 거니까요. 산문은 주로 청탁에 의해 쓰니까 노동으로 여겨지고요.”

그렇다고 시가 벼락같이, 섬광처럼 찾아오진 않는다. 며칠 가도록 한 줄도 못 쓸 때가 있다.

초기에는 전전긍긍했다. 자신의 시적 에너지가 끝났나 싶어 ‘너 왜 못 써?’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다른 ‘민간요법’을 쓰기도 했다. 술을 마신다든가 음악을 계속 듣는 식으로.

지금은 달라졌다. “안 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2008년 등단한 뒤 10여년간 써오면서 ‘시가 나랑 같은 온도로 늘 뜨거울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가 늘 내 곁에 맴돌고 있을 수는 없고, 어떤 순간엔 안 보일 만큼 저 멀리 가기도 하고요. 하지만 믿음은 생겼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이 있고, 나는 시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계속 이 일을 하고 살 거다…조금은 느긋해졌습니다.”

시인으로서 성취를 거두고 있는데도 직장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일상인으로서의 감각이 중요하다고 여겨서다.

“감각이라는 말은 간혹 추상적으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늘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쓰는 작품들은 일상적인 장면에서 어떤 미감을 찾아내는 것으로 주로 시작되거든요. 달리 말하자면, 아쉽게도 저에게는 통찰이나 혜안 혹은 언어의 벼림을 통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 직장이나 노동은 생계 문제 외에도 저의 시를 저의 시답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합니다. 아울러 시를 쓰는 제 삶과 시를 읽는 독자들의 삶이 비슷해야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커지는 것이라고 믿기도 하고요.”

박준은 4대강사업·세월호 참사 등과 관련해 꾸준히 사회적 목소리를 내왔다. 주목받는 작가로서 부담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시인이 아니라 시민으로 발언한 것이거든요. 물론 부담을 느낄 만큼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아니고요. 만약 앞으로 또 어떤 사회현실에 제가 목소리를 낸다면 그 소리는 시민으로서의 ‘박준’이 낼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작가와 작품을 일치시키는 것은 고루한 습속이다. 박준이라는 사람 역시 소심하고, 망설이는 듯하고, 슬픔의 정서가 짙게 밴 그의 시와는 달랐다.

그는 “모든 순간을 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 소심하고 곧잘 망설이는 저의 본모습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인입네’ 내세우는 것도 좋지 않고요. 시인은 내면과 스스로의 작품 앞에서만 시인이면 되지 않을까요.”

독자들은 박준의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린다. 그는 8년쯤 있다 내겠다고 한다. 여기서 ‘8’은 숫자가 아니다. 멀리, 충분한 시간을 갖고, 너무 급하지 않게 내겠다는 뜻이다. 가슴속에 할 말이 채 고이기 전에, 고인 말이 작품으로 익기 전에, 성급히 밀어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박준은 좋은 시에는 대하소설 못지않은 ‘서사’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이 시도 그렇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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