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골 여귀꽃으로 물들인 분홍 한복, 미술 작품 같네
LED 조명 넣은 몽환적 마네킹
장인 솜씨 담긴 꽃가마도 눈길
복식사 연구하며 가치 깨달아
한복의 품격, 함께 고민했으면
한복 인형 만든 외삼촌 덕에 디자이너로
“김병종 선생님 그림 속에서 그저 춤을 추고 싶었다”는 디자이너의 흥분은 제1 전시관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숲의 정령을 표현한 김 화백의 대형 그림 ‘숲은 잠들지 않는다’를 배경으로 하늘하늘한 분홍빛 원삼·말군(여성들이 말 탈 때 입던 옷)·쾌자(겉옷)·무지기 치마·살창 고쟁이 등을 걸친 10개의 마네킹이 강림한 선녀처럼 관람객을 유혹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마네킹 안에 LED 조명을 밝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점이다.
“미술관을 와보고 나서, 당초 생각했던 의상을 모두 포기하고 옷을 새로 지었어요. 샤의 일종인 춘사, 모시, 노방, 자미사 등 얇은 천을 가져다 남원을 대표하는 꽃인 여귀로 염색해 분홍빛을 냈지요. 마네킹 조명은 이번에 처음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선보인 아이디어입니다.”
제2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칠적관을 쓰고 적의를 입은 왕비 마네킹이 김 화백의 그림 세 점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산호와 비취로 만든 화려한 비녀와 떨잠 같은 장식이 위풍당당함을 더한다. 정미옥 남원시 관광시설운영담당 팀장은 “관람객들이 이런 옷과 보물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 놀라워한다”고 전했다.
제3 전시관의 또 다른 볼거리는 바로 한복을 입은 인형들. 키 61~68㎝가량인 반가 여인, 무녀, 기녀들의 표정과 손매가 정교하기 짝이 없다. 김 디자이너의 외삼촌이자 탤런트 겸 한복 인형 제작자로 명성을 떨친 허영(1947~2000) 선생의 작품이다. “이 중 흰 저고리에 쪽빛 치마 차림의 반가 여인은 외삼촌이 제게 주신, 제 분신과도 같은 인형이에요. 외삼촌은 인형의 옷은 물론 비녀 하나도 최고급 소재를 사용하셨죠. 머리카락도 일일이 심으셨을 정도니까요.”
Q : 한복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A : “아까 말씀드린 외삼촌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어요. 인형 공방에서 제 또래 조카들에게 일을 시키셨는데, 다들 힘들다고 도망가고 저만 남았죠. 제일 고집 센 아이였던 저를 점찍고 3년 만에 한복 매장을 차려주셨어요. ‘예정(藝丁)’은 삼촌의 호인데, ‘정’에는 ‘경지’라는 뜻이 있대요. 명륜동에 ‘예정 허영 한복’, 역삼동에 ‘예정 김혜순 한복’ 이렇게요.”
Q : 뭘 가르쳐 주셨나요.
A : “뭘 하든 최고급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죠. 시장 수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요. 옷감 직조도, 문양도 일일이 주문하고 염색도 직접 했어요. 그때 짠 옷감들이 아직도 남아있죠. 액세서리도 웬만한 것들은 다 직접 만들었는데, 역시 최고급 소재를 사용했어요.”
Q : 한복 짓기는 어땠습니까.
A : “외삼촌은 ‘손님을 척 보면 옷이 척하고 안 입혀지냐’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하시는 대로 따라 하다 보니, 저도 그렇게 됐죠. 그게 안 되면 옷이 안 나와요. 외삼촌은 신뢰가 없으면 못 만드는 게 한복이라고 하셨어요.”
A : “‘이 옷은 이 모델에게는 어울리지만 선생님께는 안 어울린다’고 말씀드리죠. 그럼 보통 알아서 해달라고들 하세요. 제 느낌대로 모양이며 색깔을 골라 만들어드리는데, 같은 옷은 없어요. 뭔가 달라도 다르죠. 그래서 우리 집 옷은 값이 없어요. 그냥 ‘집 한 채 값이에요’ 그래요. 집을 짓는 일이나 옷을 짓는 일이나 매한가지니까.”
Q : 그럼 김혜순 한복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A : “한국 복식의 전통을 그대로 이었다는 것입니다. 박사를 한 뒤에도 복식사 연구로 유명한 유희경 이대 교수님을 20년 동안 쫓아다니며 공부를 했어요. 외삼촌에게서 익힌 실무에 이론을 더한 셈이죠. 한복은 종합예술이거든요. 직조, 염색, 바느질에 장식이 한데 어우러지는. 서양 복식까지 연구하고 보니 비로소 우리 것이 보이더라고요.”
Q : 외국의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한복 패션쇼도 했는데.
A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의상을 담당했던 패트리샤 필드가 찾아와서 ‘이런 옷 처음 본다. 내가 왜 몰랐지’하며 자기 집으로 초대까지 했어요. 그때도 여러 나라의 복식과 비교해 가며 한복의 아름다움을 말해주었죠. 벨기에 유명 패션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의 경우도 비슷했어요.”
그때는 또 어땠나요.
A : “그는 중국이나 일본 문양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느 날 한국의 전통 옷을 구해오라고 했대요. 그때 제가 쓴 『아름다운 우리 저고리』라는 책이 파리 패션계에서 알려지고 있었는데 그게 그의 눈에 띄었고, 덕분에 그의 2012 FW 쇼에 한복에서 영감을 받은 옷이 등장하게 됐죠.”
Q : 그런 얘기들은 잘 안 알려져 있는데요.
A : “외삼촌이 늘 ‘나대지 마라’고 하셨어요.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널 찾아올 것이다’라면서. 해외 전시 소식도 잘 알리지 않아서 패션지 편집장들에게 나중에 한 소리 듣고 그랬죠.”
A :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이제는 널리 알리고 싶어서요. 값싸게 입는 한복이 있으면 명품 한복도 있다는 것도 알리고 싶고요. K팝이 알려지면서 한복에 대한 관심도 세계적으로 높아졌다는데, 정작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같이 고민하고 싶습니다.”
남원=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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