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크리스틴 역 400번.."오늘이 제일 젊은 마지막 날"
자아와 충돌 캐릭터 소화 힘들어
'유령'에 홀려 오페라 대신 뮤지컬
슬럼프·권태기 겪었지만 사랑 여전
어린 배역 몰입 위해 젊음 유지 노력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배우 김소현
이번엔 ‘오페라의 유령’이 아닌 ‘팬텀’(3월 17일~6월 27일 샤롯데씨어터)이다. 뮤지컬 ‘팬텀’ 역시 가스통 루르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 삼은 작품. 김소현은 ‘오페라의 유령’ 350여 차례, ‘팬텀’ 50여 차례를 더해 총 400여 차례 크리스틴을 노래했다. 이쯤되면 ‘영원한 크리스틴’ 아닐까. 그는 “영원한 건 모르겠지만 ‘팬텀’이 ‘크리스틴을 가장 많이 한 배우’라는 도장을 찍어줬다”고 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2016년 ‘팬텀’ 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는 안 한단다. 아직 몇 년 더 하고 싶은 눈치다.
데뷔 이래 출산 때를 제외하고 거의 쉬어본 적 없다는 그는 지금도 ‘명성황후’ 25주년 기념 공연까지 병행하느라 “냉탕온탕을 오가며 자아를 잃어버리고 있다(웃음)”고 했다. 무대에서 위엄 있는 국모를 연기하다 연습실로 돌아와 시골 아가씨의 발랄한 대사를 하다 보면 “좀 부끄럽기도 하다”는 것이다. “실제 나이와 차이가 크게 나는 역할을 하려니 더욱 몰입이 필요한 것 같아요. 20년전의 저에게 배워오고 싶은게 너무 많네요. 20년동안 하다보니 관객들의 기대치도 높아져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당연하게 여기니까요. 아무 것도 몰라도, 뭘해도 용서가 됐던 그 시절이 그리워요.”
‘두 얼굴의 크리스틴’이 다 되어본 유일한 배우로서 크리스틴의 두 얼굴은 “사뭇 다르다”. 원작을 전혀 다른 각도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노래가 참 많지만, 오히려 기교는 크게 필요 없는 곡들이에요. 약간의 성악적 느낌만 표현하면 되는데, ‘팬텀’은 대사가 많으면서도 노래는 기교를 부려야 해요. 그래서 더 어렵죠. 성악 발성을 아예 빼야 하는 곡도 있고,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줘야 해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뛰어다니며 춤추고, 정말 체력이 필요하죠.”
20년째 크리스틴을 맡고 있는 ‘크리스틴 장인’이지만, 아직도 ‘숙제’가 있다. 애초부터 자아와 부딪치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팬텀이 가면을 벗으면 크리스틴이 충격받아 도망을 가잖아요. 그 장면이 저 자신과 충돌이 돼서 힘들어요. 팬텀 역의 규현·박은태·전동석·카이의 외모가 너무 뛰어나서 더 그렇기도 하고요.(웃음) 극으로 봐선 팬텀의 처절한 아리아를 유발하기 위해 도망가는 게 맞지만, ‘나라면 도망가지 않을 텐데’ 싶은 마음이거든요. 그 후에 진심을 표현하는 장면을 지난 시즌엔 잘 해결하지 못해서, 이번에는 꼭 해결해야죠.”
“마지막 크리스틴? 내일 일은 모르죠”
노래는 혼자 부르는 것이지만 ‘싱어’는 혼자서 될 수 없다. 자기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녹음기를 틀어놔도 자기 소리가 그대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성악가든, 뮤지컬배우든, 소리꾼이든, 평생 스승을 모시며 레슨을 다니는 이유다. 크리스틴처럼 오페라 가수를 꿈꿨던 김소현에게도 ‘팬텀’ 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다.
“사실 노래가 직업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노래를 너무 들어서 어릴 땐 노래 부르기가 진짜 싫었거든요. 어머니가 ‘예원 가자’‘예고 가자’고 끈질기게 설득하셔도 꿈쩍 안 했었는데, 고2 겨울방학 때 일단 들어보라며 주신 ‘라보엠’ CD에 완전히 매료됐죠. 자는 시간도 아까워 이불 뒤집어쓰고 노래 불렀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매 공연 1시간 전에 발성 연습을 시켜주시고, 뭔가 맘에 안 드시면 공연 5분 전에도 전화를 하시죠. 데뷔 직후 어느 날엔가 하우스매니저가 ‘벌써 스토커가 생겼다’면서, 왠 중년 여성이 매일 로비에 보자기를 쓰고 와서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린다는 거예요. 저를 너무 걱정하신 어머니가 매일 로비 모니터로 지켜보셨던 거죠. 이 정도면 진정한 팬텀 아닌가요.(웃음)”
그런데 ‘오페라의 유령’은 그를 오페라가 아닌 뮤지컬로 인도했다. 대학원 재학 중 유럽 데뷔를 도와줄 기획자가 나타나 이탈리아로 떠나기 나흘 전,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오디션에 참여했다가 뮤지컬에 발목 잡힌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오디션을 심사한 원작자들이 저의 당당함에 놀랐다고 할 정도로 태연하게 노래했죠. 기획자에게 ‘오페라의 유령’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끝나고 나니 도저히 떠날 수 없더군요. 뮤지컬을 너무 사랑하게 됐거든요. 곧바로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 들어갔고, 그 후로 쉬지 않고 작품을 했어요.”
오페라를 포기할 만큼 뜨거웠던 뮤지컬 사랑도 10년쯤 지나자 심드렁해졌다. ‘뮤지컬과 결혼했다’는 마음으로 일에만 매달렸던 만큼, 슬럼프가 오자 뮤지컬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도 ‘오페라의 유령’이 그를 도왔다. 상대역으로 지금의 남편 손준호를 만난 것이다.
10년 차 슬럼프를 출산으로 극복했다면, 20년 차 슬럼프를 막아준 건 코로나다. “이번에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무대와 멀어지게 됐으니까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10년 차, 20년 차에 큰 고비가 온다잖아요. 그런데 내일 당장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니 늘 오늘이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게 돼요. 마스크 쓰고 계신 관객들 보면 매번 울컥하죠.”
나만의 팬텀은 ‘보자기 쓴’ 어머니
사랑을 이룬 뮤지컬과는 때때로 권태기도 겪어 왔지만, 이루지 못한 오페라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요즘도 오페라 서곡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고 눈물이 날 정도란다. “그런데 뮤지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음악으로 하는 극이니까. 오히려 모국어로 한국 관객과 교감하는 매력이 있죠. 여주인공이 거의 죽는 것도 그렇고.(웃음) 제가 2019년엔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 ‘안나 카레니나’ 하면서 백몇 번을 죽었더라고요. 이젠 죽는 게 더 자연스러워요. 크리스틴은 죽지 않으니까 뭔가 하다 만 느낌이랄까.(웃음)”
하긴 그를 노래하게 만든 뮤즈,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부터가 비련의 여주인공의 대명사다. 대학 3학년 때 ‘라보엠’으로 오페라에 최연소 데뷔했을 때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때 학교 50주년 기념 오페라로 예술의전당에서 ‘라보엠’을 했었거든요. 지금 ‘명성황후’와 같은 공연장인데, 시해 장면 후에 누워서 천장을 보면 만감이 교차해요. ‘라보엠’의 미미가 죽고 난 뒤 올려다봤던 천장이니까요. 20여 년이 흘렀지만 분장실도 천장도 그대론데 나만 변했다는 느낌? 코로나 시국이라선지 좋았던 추억을 새삼 더 곱씹게 된 것 같아요.”
20년간 스무살로 살 수 있는 게 ‘최강동안’ 때문만은 아닐 터다. 그의 말대로 ‘화장, 조명 덕’도 있겠지만, ‘오늘의 무대에 충실하자’는 한결같이 순수한 마음 때문 아닐까. 배우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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