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겸업 소설가의 능청스러운 단편집

신준봉 2021. 2. 2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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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자음과모음

결핍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렇더라도 사람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까. 가령 이른바 ‘사’자가 들어가는 전문직은, 그러니까 의사나 변호사는 덜하지 않을까. 결핍 말이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 이현석(37)이 처음 소설가가 됐을 때 좀 의아했다. (그는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에 당선돼 소설가가 됐다. 그 과정에 기자가 입회했다) 그가 의사여서다. 등단 4년 만에 나온 첫 소설집을 읽다 보니 그가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어쩌면 결핍보다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핍이 뭔가 이야기를 생산할 테니, ‘결핍’과 ‘이야기’를 경합시킨 앞 문장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잠깐, 다시 생각해 보면 이현석에게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 같다는 얘기도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이현석에게는 꾹 참고 넘어가 주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것 같다. 사회적 불의, 단순한 불의 차원을 넘어서는 국가 폭력, 수시로 짓밟히는 삶의 윤리, 이런 것들 말이다.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은, 연애를 소재로 한 ‘컨프론테이션’ 정도를 빼면, 고스란히 그런 문제들을 건드린다.

이현석의 소설집은 윤리를 강조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사진 자음과모음]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는 소설 창작의 윤리 문제를 다뤘다. 병원이 배경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의사 겸 소설가인 이현석 자기 얘기다. 의료 현장의 실제 사례를 여과 없이 작품 소재로 써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배어 있다. ‘다른 세계에서도’도 역시 ‘전문가 찬스’를 사용한 작품. 낙태죄 폐지 운동에 나선 의사들의 얘기다. 지금 말하려는 대목이 빛나는 지점일 텐데, 소설은 여성 입장에서 낙태죄 폐지의 당위성을 강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의료인들 내부의 분열된 목소리를 들려준다. 낙태를 옹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새 생명의 심장 박동에도 매혹되는, 여성 화자의 모순적인 태도가 작품에 실감을 더한다.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은 일단 그냥 두고 넘어가자.

소설집을 두 배로 즐기는 방법은 베스트 순위를 매겨보는 것이다. 기자에게 베스트는 ‘컨프론테이션’이었다. 독일의 테러리스트 그룹 적군파, 이들을 형상화하려 했던 현대 미술가 리히터(‘컨프론테이션’은 리히터의 연작 제목이다)를 함께 엮어내지만 소설은 결국 연애 혹은 사랑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다. 그 핵심이 다음 인용문에 들어 있다.

“육욕이나 열정을 넘어 사랑의 저 깊은 층위에 헌신이 있다면, 헌신은 곧 유일성을 묻는 과정일 것이고 그 과정은 역설적으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내포할 텐데, 그렇다면 사랑은 스스로를 얼마나 속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 (168쪽)

연애는 몰라도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는 문장이다. 이 작품 역시 여성(변호사)이 화자. 이현석의 능청스러운 전환이 감탄스럽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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