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북극곰 장례식' 열려

강지남 2021. 2. 2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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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雪으로 만든 북극곰 20여 마리

음악 공연과 함께 프로젝트 마무리하는 ‘장례식’ 진행

녹아 사라지는 과정 지켜보며 “지구온난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2월 24일 오후 5시(현지 시각),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특별한 ‘북극곰 장례식’이 열렸다. 실제 북극곰은 아니고, 눈으로 만든 북극곰을 자연으로 되돌려보내는 행사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70여 명의 뉴욕 시민은 싱어송라이터 로버트 브래셔(Robert Brashear)의 노래를 들으며 영상으로 올라선 기온 탓에 벌써 반쯤 녹아버린 북극곰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에 조금씩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센트럴파크의 북극곰’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두어 주 전. 독일 출신 예술가이자 어퍼웨스트사이드 주민인 하이디 해트리(Heide Hatry, 55세)가 만든 작품이다. 그는 센트럴파크의 서쪽 86번가 출입구 인근에 책 읽고, 기타 치고, 레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마치 사람처럼 평범한 일상생활을 즐기는 북극곰 20여 마리를 만들었다. 이번 겨울 뉴욕에 예년보다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에 북극곰을 창조할 ‘재료’는 충분했다. 장례식 현장에서 EBS 글로벌리포터를 만난 해트리는 “최근 두 주간 새벽마다 공원에 나와 새로운 곰을 만들거나 밤새 망가진 북극곰을 손본 뒤 집에 가서 쓰러져 자곤 했다”며 웃었다.

 

◆2월 24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눈으로 북극곰을 만든 예술가 하이디 해트리가 장례식 행사에 참석한 뉴욕 시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강지남 

 

◆하이디 해트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센트럴파크의 북극곰들. ⓒinstagram.com/heidehatry

 

‘센트럴파크의 북극곰’은 뉴욕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공원에 눈으로 만든 곰이 있다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시민들이 일부러 찾아왔고, 지역뉴스채널인 ‘뉴스1’ 등에도 보도됐다. 특정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 한 시민이 ‘스노우뱅크시(Snowbanksy) 2021’라고 적은 푯말을 달아주면서 이 곰들은 스노우뱅크시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신원을 감춘 채 활동하는 영국 출신 유명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날 두 딸과 함께 공원을 찾은 트레이시는 “이른 아침에 조깅할 때마다 곰을 손질하는 작가를 목격하곤 했다”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놀라운 아이디어이자 헌신”이라고 평가했다. 해트리는 “내가 작업하는 동안 따뜻한 차와 간식을 가져다주며 응원해주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며 “곰들이 쓰고 있는 우산도 ‘비에 녹지 말라’며 주민들이 가져다준 것이고, 센트럴파크 직원들도 나의 활동을 막기는커녕 센트럴파크 인스타그램에 곰들의 사진을 찍어 올려줬다”고 말했다.

 

해트리가 눈으로 북극곰을 만든 것은 비단 곰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눈으로 만든 곰이 녹아 없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지구 온난화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북극곰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로, 현재 전 세계에 남아있는 개체수가 2만2000마리에서 3만1000마리에 불과하다. 이 수마저도 2050년에 이르면 3분의 1로 줄어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해트리는 네 마리의 곰 가족 앞에 ‘추운 상태로 있게 해주세요(Let us chill)’라는 글귀를 써놓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곰 앞에는 ‘엄마,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이 뭔가요?”라는 푯말을 달아놨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북극곰들을 보고 미소 짓다가, 앞으로 이들이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는 글을 올리며 북극곰 인터내셔널(Polar Bear International)에 대한 기부도 권했다. 북극곰 인터내셔널은 야생 북극곰 보호 활동을 펼치는 비영리단체로, 매년 2월 27일을 국제 북극곰의 날(International Polar Bear Day)로 지정하고 관련 캠페인을 진행한다.

 

 

◆하이디 해트리(위)와 북극곰 장례식 행사에서 방명록에 소감을 남기는 한 뉴욕 시민. ⓒ강지남

 

북극곰 장례식은 해트리가 북극곰을 장식하는데 사용한 물품을 정리하는 동안 참가자들이 방명록에 ‘스노우뱅크시 프로젝트’에 대한 소감을 적고 뮤지션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축제 방식으로 진행됐다. 8살, 7살, 2살짜리 세 자녀와 함께 이 행사에 참석한 수잔은 “많은 사람들이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은 채 바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달랐다. 스노우뱅크시 덕분에 많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즐거워하고, 또 지구온난화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며 “함께 하는 이웃들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가로질러 왔다. 집에 가자고 보채지 않는 걸 보면 아이들도 이 자리를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 강지남 글로벌 리포터 jeenam.kang@gmail.com

 

■ 필자 소개

(전) 월간 '신동아' 및 시사주간지 '주간동아' 기자

동아비즈니스리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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