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꿈을 다시 찾았다, 용기 있게

한겨레 2021. 2. 2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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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강유가람의 처음 만난 다큐][토요판] 강유가람의 처음 만난 다큐
④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포스터.

※ 이 글은 다큐멘터리 <셔커스>에 대한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차별적인 문화예술계 안에서 남성 멘토들은 여성 영화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훌륭한 조언도 있겠지만 작품에 대한 응원은 고사하고 영혼과 시간을 착취당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가끔 업계를 떠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될 때 마음이 저릿하다.

샌디 탄 감독의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2018)는 자신이 온 마음을 바쳐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한 영화의 필름을 자신이 믿고 따랐던 남성 멘토가 통째로 들고 사라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싱가포르 출신인 샌디 탄 감독은 10대 시절 자신에게 영화를 가르쳤던 강사 조지 카도나에게 깊은 영향을 받는다. 감독은 새로운 영화 지식을 알려주고 영화적 감성을 북돋아주었던 조지와 함께 1990년대 초반 영화 <셔커스>를 찍으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제작 현장은 즐겁기도 했지만 위험한 순간들이 종종 발생했다. 연출로 나선 조지를 컨트롤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제작비가 떨어지자 조지는 샌디와 친구들을 데리고 다니며 그들의 통장에서 돈을 인출하게 한다. 하지만 샌디는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 그 상황을 외면한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감지했던 친구 재스민과 소피도 일단은 영화를 완성하는 것에 열과 성을 다한다. 영화가 완성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한 장면.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사실 어두운 징조는 이전부터 있었다. 영화가 제작되기 전 둘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조지는 샌디 탄 감독을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지만 샌디는 거부하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로 그 순간을 넘긴다. 그 일은 샌디를 파괴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화를 다 촬영하고 난 다음에 생긴다. 방학 전체를 바쳐 제작한 필름을 들고 조지가 사라진 것이다. 조지는 이들이 공들인 시간을 조롱하듯 연락을 끊고, 끔찍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온다. 샌디와 친구들은 도둑맞은 필름을 기다리며 절망에 빠진 채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왜 조지가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하지만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샌디는 조지의 부고와 함께 조지의 전 아내로부터 필름 70통을 전달받게 된다. 20여년이 지난 뒤 무성영화로 돌아온 <셔커스>를 만난 샌디는 이 사건의 시작과 원인을 다시 되돌아보는 여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 나는 이 여정 속에서 조지 카도나가 영화로 연을 맺은 약자들을 어떻게 조종하고, 영감과 시간을 바치게 했는지 알게 됐다. 그들의 헌신과 반짝이는 재능은 조지가 영화작업을 하는 데 자주 이용됐고 조지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하거나 더 빛나려 하면 그로부터 방해받거나 단절되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샌디의 작품이 도둑맞게 된 배경이 어렴풋이 밝혀진다.

샌디와 친구들이 빚어냈던 <셔커스>의 장면들은 기이할 만큼 아름다워서 빼앗긴 시간들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꿈을 앗아간 가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파헤치는 데만 모든 비중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다. 감독은 자신이 침해당하고 빼앗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집요하게 탐구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며, 1990년대 초반 싱가포르의 공간과 사회상을 그리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영화와 자신밖에 몰랐던 감독은 이 여정 속에서 자신에 대한 친구들의 충고를 뼈아프게 성찰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성장담이다.

<셔커스: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서> 한 장면. 넷플릭스 화면 갈무리

감독은 가장 사랑했던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했을 때의 절망감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서 극복하는 듯 보인다. 조지는 샌디에게서 <셔커스>를 완전히 빼앗지 못했고 샌디는 <셔커스>를 새롭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빼앗긴 자는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새롭게 깨닫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다큐멘터리는 보여준다. 자신의 피해를 끝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도 샌디처럼 돌아와 자신만의 세계와 언어를 다시 만들 것이다. 일시적으로 패배한 듯 보여도 결코 가해자가 생존자의 사랑과 용기마저 파괴할 수는 없으므로. 영화감독

▶ 강유가람 감독은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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