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사랑 그대로 돌려주자 다짐"..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참 봉사인

윤창식 2021. 2. 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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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숙 회장이 공사현장에서 현장 지휘를 하고 있다.

별명이 여럿이다. 부동산 운용 건설사를 운영하면서 ‘불도저’가 됐고 철강회사를 운영하면서 ‘철의 여인’이 됐다.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나서면서 품게 된 통일에 대한 신념을 지켜오며 지역의 ‘통일꾼’이기도 하다. 첫눈에 봐도 당차고 소탈한 ‘여장부’. 무엇보다 마음씨 따뜻한 ‘아줌씨’다. 강정숙(56) 동재건설 회장 이야기다.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저마다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벽의 고임돌처럼 주어진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이라 봉사도 마당발이다. 아동보호센터, 노인요양센터, 복지시설, 장애인 단체 등 후원처가 몇 곳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냥 수십 곳 정도란다.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 대구경북 지회장, 전국 장애인 인권 보호위원회 이사직도 맡고 있다. “온기는 나눌수록 더 커져요.”

강 회장은 지난해 12월 통일부장관상을 받았다. 투철한 봉사정신과 사명감으로 북한 이탈 주민 정착 지원에 헌신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만주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서 고려인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아버지는 특히 발해문화와 연변지역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그는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지금까지도 북한 주민과 평화,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가족사진

“어린 시절 아버지는 새벽마다 저를 깨워 논어를 읽게 하셨어요. 밖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가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읽어야 했죠. 날마다 졸린 눈을 부비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 책을 읽었고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일을 하셨어요. 그때는 마냥 귀찮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깊은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리를 깨우쳐 준 소중한 문장을 그는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두고 있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다달이 절에 가서 가족의 안녕을 빌던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불교청년회에 가입했다. 동아리 가입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독서회 활동도 하면서 폭압적인 군부 정권에 저항했다. 최루 가스에 눈물 콧물 흘리던 거리 시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궂고 젖은 일은 대부분 어머니 몫이었다.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그의 삶 곳곳에 투영됐다. 그가 일찍부터 여성의 인권 내지 권리를 찾고 여성의 사회 참여 활동을 적극 돕게 된 바탕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가 대구 여성의 전화 상담사로 활동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정규직 전환이후 건설현장에서 고사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 임시직 여성으로 작업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과 설움이 컸습니다. 하지만 주눅 들기는커녕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키우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건설업에 눈을 뜬 거죠. 여성이기 때문에 못 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 나가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일했습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했고 그런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를 적극 도와주기 시작했다. 본인의 근면 성실과 주변의 도움 덕에 2년 뒤 정규직이 됐다. 얼마 후 회사를 그만뒀다. 독립해 어머니와 식당을 운영했다. 맛집으로 알려지면서 식당은 성공이었다. 덕분에 가난 때문에 하지 못했던 공부도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잠깐, 어머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떠나고 그는 큰 절망에 빠졌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였기에 종교적인 회의도 컸다. 식당 사업의 파트너를 잃은 그는 다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농가주택과 빌라 등을 건축, 개조해 팔고 공장 신축사업도 진행했다. 남성 전유물이었던 건설업에서 그는 남보란 듯 성공했다. 감사했다. 그는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 준 사람들을 다시 떠올렸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받은 사랑을 그대로 돌려주자 다짐했습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 아니겠어요.”

최영조(오른쪽) 경산시장에게 드림 스타트 가족 및 저소득 이웃을 위해 1억원 상당의 생활용품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3년 전부터 매달 커피, 스포츠 음료 등 식품류와 세제, 치약 등 생활용품 300여 상자 기부해 오고 있다. 또 대구경북 지자체와 적십자 대구지사에도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중견 기업인으로, 열정 자원봉사자로, 만학도로 그는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에게는 아직도 지치지 않은 열정의 버킷 리스트가 가득하다.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 청소년을 위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통일 운동가, 세계 오지 탐험가, 지역 개발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는 것…. 지금의 성공으로도 채워질 법도 하지만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이 그를 이끌어간다.

“누구는 허황된 꿈이라 비웃겠지만 오늘의 꿈이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거니까요. 살아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눌 겁니다.”

윤창식 기자 csy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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