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쉬지 못했던 '민초 여인네의 삶' 애처로워 웁니다"

한겨레 2021. 2. 2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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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엄마.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 가난한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이 떠올라요.

엄마의 삶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 가끔씩, 그 시절 여고를 다녔다는 고운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듭니다.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거라고 생전에 가끔 말씀하시던 엄마의 치열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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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어머니에게 바치는 큰딸의 글
2009년 국가정원으로 지정되기 이전 전남 순천의 동천변 유채꽃밭으로 모처럼 가족 나들이를 갔을 때 함께한 어머니 장넙순(오른쪽)씨와 필자인 큰딸 정민숙씨. 정민숙씨 제공

그리운 엄마.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 가슴이 아려옵니다. 오는 3월 24일이면 엄마, 장넙순님이 제 곁을 떠나신 지 어느새 1년이네요. 하지만 저는 멍하니 당했던 갑작스런 엄마의 부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어요. 가끔 막연하게 부모님의 죽음과 이별을 상상은 했었지만, 그렇게 번개치듯 내리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장례식을 정신없이 무감각하게 치르고 나서 지금까지 눈물, 한숨, 후회, 자책감 등 여러 감정을 느끼고 겪고 있어요. 그동안 의식적으로 멀리해왔던, 노년과 죽음이란 단어가 저에게도 확연히 다가 오네요. 이제야 철이 드나싶어 혼자 헛웃음만 지어요.

엄마.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 가난한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이 떠올라요.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맨몸의 건강한 육신과 영혼만 의지한 채 악착같이 피땀 흘려 살아온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의 삶 말이에요. 전라도 남녘 순천 왕지동의 가난하고 늙은 소작농의 큰 딸로 태어나서 군입을 줄이기 위해 팔려가듯 남의 집 어린 식모로 일하기도 했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남들 학교 다닐 때 공장을 다니셨다지요. 그 시절 남자들은 왜 다들, 어린 딸내미가 가장 노릇까지 해야 할 정도로 무능했을까요. 왜 딸들과 아내들이 그 험하고 거친 일들을 군말 없이 다 했어야 했을까요. 그 시절 어린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엄마의 삶에 대한 애처로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 가끔씩, 그 시절 여고를 다녔다는 고운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듭니다.

궁벽한 시골벽지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과 결혼한 엄마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분이셨어요. 젊은 새댁이었던 결혼 초기를 회상할 때마다 엄마는 베틀일을 못해서 밤 늦게까지 시어머니 밑에서 졸면서 쩔쩔매셨다며, 결혼 한달 만에 도저히 답이 안나온다 싶어 아빠를 설득해서 시댁을 빠져나와 순천에 달방을 얻어서 맨손으로 막일을 시작했다고 하셨죠. 순하고 무뚝뚝하고 말 없는 아빠를 대신해서 엄마는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일이 많으셨어요. 덕분에 만고에 호인이셨던 아빠의 빚보증과 사기에 휘말려 써보지도 못한 돈을 갚느라 반평생 힘들게 일하시던 모습을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저는 보고 자랐어요. 제 어린 기억에 집에 몰려온 빚쟁이 아줌마, 아저씨들로 인해 무서웠던 순간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결혼 이듬해인 2009년 신혼인 큰딸 부부를 보러 온 부모님과 함께 집 근처 순천 동천변으로 나들이를 갔다. 왼쪽부터 아버지 정혜상씨, 어머니 장넙순씨, 필자 정민숙씨, 남편 이영섭씨. 정민숙씨 제공

하지만 엄마는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으셨어요.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거라고 생전에 가끔 말씀하시던 엄마의 치열했던 삶. 그 삶을 불효녀 큰딸이 감히 애도하는 글을 씁니다. 74년 평생 쉬어보지도 못하시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지도 못하시고 일만 하시다가 갑작스럽게 저 세상으로 가셔서 이 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아낌없이 사랑해 주시고 베풀어 주셨는데 사랑한다고 말 한 번 제대로 못한 못난 이 딸을 용서해 주세요.

엄마. 엄마의 인생을 큰 딸로, 큰 며느리로 묵묵히 자기 자리를 흔들림없이 지키며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자식들과 이웃들에게 본보기가 된 엄마. 장넙순의 삶이 어느 명문거족의 삶과 비교해도 부끄럼없이 훌륭하기에 한겨레 지면에 이 글을 올립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순천/정민숙

‘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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