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칼럼] 2020, 그 자부심의 세대

한겨레 2021. 2. 2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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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
60년 전의 우리 4·19세대는 ‘식민-후진국’의 열등감에 젖어 부끄러워야 했고 자식뻘의 86세대는 ‘주변부-종속’ 사회의 분단국민이라는 피해의식에 빠져 자학해야 했다. 그런데 신세대는 지난 시절의 ‘약소국 설움’들을 이 코로나 역병의 시대에 오히려 ‘강한 장점’으로 바꿔보라며 ‘반전의 시선’을 제시한다. 그 두려움 없는 신세대의 자신감을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으랴.

김병익ㅣ문학평론가

나는 21년 전인 2000년 3월 내가 일하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30여년의 내 열심에 대한 자족감에서라기보다 앞으로 올 새 문명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게으른 아날로그 세대가 밀레니엄 세대의 디지털 환경을 겪어낼 방법을 익히지 못했고, 무력감으로 패배할 말년의 내 생애가 덧없이 구겨지느니보다 조용히 물러나 내가 감히 짐작하지 못한 21세기 문명을 구경하며 음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추신을 달듯 은퇴 후에도 몇 해 강단과 공직 일을 잠시 맡긴 했지만 내 관심은 낯선 시대에 부닥칠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신선한 체험에 매여 있었다.

그 체험은 과연 새로웠다. 물자는 좋아지고 참으로 풍부해졌으며 자가용으로 나다니고 해외여행도 이웃 마실처럼 잦아졌다.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손바닥만한 판때기 안에 수첩의 메모에서 백과사전의 지식들, 빠르고 다양한 갖가지 정보들, 숱한 엔터테인먼트들이 들어 북적거리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하루가 지루할 리도, 무엇 모를 일도 없었다. 우리나라가 그 스마트폰의 최강국이었다. 여기에 철강 조선 정유 등 중공업의 강대국, 반도체의 최선진국이며 가장 앞서 디지털 행정을 구축했고 정치적 민주화는 정착되고 남북 간의 이산가족 상봉과 정상회담도 했다. 신도시가 우후죽순처럼 건설되면서 전 국토가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우리는 어느 사이 지구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다가가 월드컵을 개최하고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다.

이 ‘압축성장’으로 말미암은 어둠을 물론 놓칠 수는 없다. 전대미문의 9·11 테러로 시작된 21세기, 피에로의 허세로 가득 찬 트럼프와 굴기의 기치를 휘두르는 시진핑의 각축 사이에 끼인 불편한 국제정치 속에서 우리나라는 경제적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하고 빈부격차와 세대갈등은 더욱 심각하며 인구는 줄고 전통적인 가족구조가 해체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노동의 질과 조건은 더욱 악화하고 갑질의 행패는 심해지며 공동체 생활의 유대감은 줄어들고 영유아 학대는 가혹해진 나쁜 세상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세계와 함께 코로나19의 대역병에 휩쓸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정치사에서 내게 의아스러운 것은 21세기의 20년 동안의 선출된 우리나라의 대통령 누구도 온전한 은퇴를 누리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분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고 다른 둘은 어두운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 10위권의 대국에 올랐다는 경제적 선진과 분명 어울릴 수 없는 정치적 후진의 엇갈린 모습이다. 여기에 한국의 선진화를 이끄는 기업의 영수 역시 감방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마주 보기 어려운 어깃장이다.

이 현실사회의 부조리를 현장감 있게 확인시켜준 것이 조국 사태 이후 치사스러운 86세대의 타락, 장관과 총장의 볼썽사나운 힘겨루기, 끝내 지엄한 사법부 수장까지 거짓말쟁이로 발각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장면 등이었다. 어쩌다 이처럼 다수의 횡포를 넘어 독재로의 후퇴가 어른거릴 정도까지 우리는 참담하게 되었는가? 나는 그 실제를 알고 싶어 시론집을 몇권 찾았다. 그 저자들은 진보적인 학자로 알고 있는 논객들이지만 이제는 그 진보파 세대의 ‘배반’을 비판하고 있었다. 제목부터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싸가지 없는 정치>로, 진보주의를 표방한 정권의 배신에 대한 공격들이 뜨겁게 들끓고 <진중권 보수를 말하다>에서는 오히려 ‘보수 꼴통’에게 격려의 훈수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본 것은 ‘문빠’가 보이는 ‘팬덤 정치’라는 현상과 그것이 “‘떡검, 기레기, 토착왜구, 뭉클, 울컥, 사랑해요, 지키자’는 일곱 마디”로 압축되는 현실, “집단의 소속감이 이념보다 앞서는 내로남불”의 풍조 속에서 “‘아빠 찬스’는 기회의 평등함이 되고 ‘부정 입학’은 결과의 정의로움이 되었다. 가치는 전도되었다”는 역설의 세상이었다.

그런 인식의 전복 사태 속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보수의 복거일은 <낭만적 애국심>을 비판하며 이승만, 이광수의 재평가를 요청하고 진보파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역사의 불행에서 오히려 ‘창조적 파괴’를 발견하며 “중심부의 문명을 받아들여 내재화함으로써 사회를 진화시킨 과정”을 정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 말을 실감 있게 확인시켜준 것이 1980년대에 태어난 30대로 짐작되는 젊은이들이 쓴 <추월의 시대>였다. 내게는 아주 생소한 김시우, 백승호, 양승훈, 임경빈, 하헌기, 한윤형 등 6명의 저자들은 우리나라가 1987년에 새로운 분기를 맞아 “민주항쟁에서 도출된 사회적 합의 이후 6공화국 헌법으로 모터를 갈아끼우고 30여년을 달려 (…) 비록 도중에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급기야 근대화에 먼저 성공하고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았던 옆나라를 추월해버렸다”고 확신한다. “한국 사회는 이미 객관적으로 ‘추격의 시대’를 지나 ‘추월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식민지였고 여전히 분단국이지만 그럼에도 “한국인으로 생존했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성공담이었다”는 그 콤플렉스 없는 자신감에 나는 감동했다. 그것은 서슴없는 자부심에서 솟은 당당한 자기 세대 선언이었다.

<금지된 지식>의 저자 에른스트 피셔는 1960년대를 “심장이식과 달나라 여행을 배우던 미래학의 위대한 시대”라고 규정해서 그 세대의 내 늙은 나이를 위로하고 있지만, 60년 전의 우리 4·19세대는 ‘식민-후진국’의 열등감에 젖어 부끄러워야 했고 자식뻘의 86세대는 ‘주변부-종속’ 사회의 분단국민이라는 피해의식에 빠져 자학해야 했다. 그런데 신세대는 지난 시절의 ‘약소국 설움’들을 이 코로나 역병의 시대에 오히려 ‘강한 장점’으로 바꿔보라며 ‘반전의 시선’을 제시한다. “먼저 통일에 대한 강박을 벗어던지고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는 숙제”를 해결하면 “주관적 약소국이지만 객관적 강대국”일 수 있을 ‘약소국의 축복’을 멋지게 누릴 것으로 그들은 장담하고 있다.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민주주의 국가는 결코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에 흡수되는 전개를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그 두려움 없는 신세대의 자신감을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으랴. 나는 자부심 넘치는 2020세대에게, 감히, 새해 새봄의 축복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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