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 병역거부 2명은 유죄.."양심을 감옥에 가뒀다"

이혜리 기자 2021. 2. 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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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참여연대·전쟁없는세상 등 시민단체들이 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에서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홍정훈씨(맨 왼쪽)와 오경택씨(맨 오른쪽)도 참석해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여호와의증인 신도와 같은 종교적 양심이 아니라 비폭력·평화주의 등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법원이 처음으로 무죄를 확정한 25일, 2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여전히 유죄를 선고받았다. 비폭력·평화주의 활동을 해온 홍정훈씨와 오경택씨다. 이들을 지원해온 시민단체들은 “양심을 감옥에 가두려고 한다”며 대법원을 비판했다.

홍씨는 폭력을 내면화하는 군대에 비폭력 수단으로 저항하겠다며 2016년 12월13일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오씨는 국민을 향해 작전하고 학살하는 군대에 들어갈 수 없다며 2018년 6월27일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으로,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두 사람은 3~4년간 형사재판을 받았다. 국제사회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한국에 권고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병역거부의 양심은 종교에 국한된 게 아니라 윤리적·도덕적·철학적 또는 이와 유사한 동기에서 기인할 수 있다면서도, 두 사람의 병역거부는 ‘진정한 양심’에 따른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의 병역거부가 비폭력·평화주의보다는 주로 권위주의적 군대문화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고, 군대 내 인권침해와 부조리는 병역거부의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본 원심 판단에 대법원이 수긍한 것이다.

여태까지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비종교’, ‘비여호와의증인’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이날 무죄가 확정된 사례와, 지난해 11월 의정부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 총 2건 뿐이다. 대부분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병무청 대체역 심사위원회는 지난달 처음으로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역 편입신청을 받아들인 상황이다.

▶관련기사: [단독]종교 아닌 ‘평화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첫 대체복무 인정

홍씨와 오씨를 변호한 임재성 변호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종교적 신념 이외의 평화주의 신념을 충분히 포용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에 한국사회·법원의 문턱이 너무 높다”며 대법원 판결을 비판했다.

임 변호사는 “2018년 헌재와 대법원 판결 이후 더 이상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한 해에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감옥에 갔던 야만적인 제도가 멈춰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제도는 바뀌었지만 결국 오늘도 2명의 젊은이가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신념을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임 변호사는 “두 사람 모두 사회적 비난과 낙인, 1년6월의 감옥행과 같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병역거부를 택했다”며 “대법원에서 비록 양심을 좁게 판단하는 판결을 했지만 (이같은 대법원 입장이)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참여연대·전쟁없는세상 등 시민단체들이 2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에서 비폭력·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이) 양심을 감옥에 가두려고 한다”고 했다. 연합뉴스


기자회견에 나온 홍씨는 “오늘 판결에도 불구하고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병역거부를 마다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다시는 저와 같은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는 경우가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오씨는 “법원이 또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했다. 오씨는 “그동안의 재판은 제 삶에서 형성된 신념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총을 들어야 한다는 말을 쥐어짜내기 위한 질문을 받는 과정이었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로 국가가 끊임없이 개인의 신념의 자유를 심사하고 선별하려 든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했다.

김민영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는 “대체복무제가 시행되면서 한국사회는 1만9000명의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가둔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진전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의 재판 결과는 사법부가 병역거부자들을 어두운 과거에 그대로 내버려두겠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축소시키는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김 활동가는 “사법부는 양심을 협소하게 해석하면서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오히려 침해했다”며 “대법원의 기준이라면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양심 없는 대법 판결을 규탄한다”는 글을 올렸다. 용 의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복무가 마련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십자가 밟기를 멈춰야 한다”며 “필요한 것은 양심을 판별하는 것도, 법원의 양심 없는 판결도 아닌 대체복무 방안 확대와 선택권의 확장”이라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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