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폭력 신념 진정성 있다".. 대법, 양심적 예비군 훈련거부 첫 무죄 판단

최나실 2021. 2. 2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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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새 판례 법리
예비군 사건에도 적용.. 관건은 '진정한 양심'
'평화주의' 진정성 인정 안 된 입영거부는 유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인 지난 2017년 5월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회원들이 '옥중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후 2018년 6월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신설하라는 판단을 내놓았고, 같은 해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4년 만에 기존 판례를 뒤집어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류효진 기자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 거부’라는 도덕적 신념도 예비군 훈련 거부 사유로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25일 나왔다. 개인적 삶을 통해 형성된 ‘비폭력’ 신념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고, 예비군 훈련 소집에 거듭 불응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남성에 대해 무죄 확정 판결을 내린 것이다.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준을 제시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 판례에 따른 결과다. 대법원은 같은 법리를 적용, 이날 ‘평화주의’를 이유로 입영을 거부한 다른 2명에 대해선 “진정성을 인정하기 힘들다”며 유죄를 확정하기도 했다.


"가정폭력·군대경험에 비폭력 신념 싹터"

대법원 1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이날 병역법 및 예비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윤리ㆍ도덕ㆍ철학적 신념에 의한 경우라도 진정한 양심에 따른 예비군 및 병역동원 훈련 거부라면 예비군법 등에서 정한 ‘정당한 거부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A씨는 2016년 3월부터 2018년 4월까지 총 16회에 걸쳐 예비군 훈련소집 및 병력동원 훈련소집 통지서를 전달받고도 훈련에 불참했다가 재판에 회부됐다. 21개월간 군 복무를 정상적으로 마치고 2013년 2월 제대하긴 했지만, 군대에서의 경험으로 ‘반(反)폭력주의’ 신념이 더 확고해져 이후부터는 예비군 훈련 통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게 A씨 주장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고통 받는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해 어릴 때부터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됐다”면서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애초 병역거부를 하지 않았나’라는 의문에는 “(형사처벌을 우려하는) 가족들의 간곡한 설득, ‘전과자가 돼 불효하는 건 이기적 행동’이라는 생각에 입대를 한 것”이라며 “그러나 이후 반성하며 양심을 속이지 않기로 했다”고 답했다. 집총 훈련 후 입대를 곧바로 후회했고, 군사훈련을 받지 않을 수 있는 ‘회관(식당) 관리병’에 자원해 그곳에서 복무했다고도 덧붙였다.


1·2·3심 모두 "진정성 인정...무죄"

특히 군대 내 ‘폭행 사건’을 겪고선 반폭력 신념이 더욱 강해졌다고 했다. 다른 병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후임병의 탈영으로 A씨를 제외한 다른 동료 병사들 모두가 처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당시 ‘소극적 방관자’로 행동했던 내가 ‘양심에 반해 타협한 기회주의자’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A씨는 또, “미군이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살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잘못’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도 말했다.

1심은 “자신의 신념 형성과 군사훈련을 거부하게 된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형벌 위험 등 불이익을 감수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며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수년간 이어진 수사와 재판 탓에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도 고려됐다. 2심도 같은 판단을 유지했고, 대법원 역시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진정성 의심' 입영거부 2명은 유죄 확정

A씨의 무죄 확정은 지난 2018년 11월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음으로 ‘합법’으로 판단한 대법원 전합 판결에 기초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도 유죄’라는 기존 판례를 14년 만에 뒤집으면서 “병역거부의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한 경우’엔 처벌할 수 없다”는 새 법리를 내놓았다. 대법원은 이날 “예비군 훈련도 집총ㆍ군사 훈련을 수반한 병역의무 이행”이라면서 A씨 재판에서도 같은 법리가 적용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법원 전합 선고 이후, 하급심에선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과 관련해 각 피고인들의 성장배경, 사회활동 등 삶의 전반적 과정을 두루 살피며 ‘양심의 진정성’을 판단하고 있다. 이날도 대법원은 ‘비폭력ㆍ평화주의’ 신념을 이유로 입영을 거부했던 오모씨와 홍모씨에 대해선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오씨는 과거 집회에서 경찰을 가방으로 때려 처벌받은 전력이 있고, 홍씨는 병역거부 전에 반전ㆍ평화 분야에서 활동한 이력이 없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대법원 결론이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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