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에게 필요한 건, 나만의 공간"
"내 능력으로 여성을 돕고 싶어요" 여성 주거 자립 돕는 공인중개사
서지유 두드림 공인중개사사무소장, 여성 대상 부동산 세미나 열어
수익금은 여성 폭력 방지 힘쓰는 단체에 기부
지금 여자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 돈, 남편 돈이 아닌 바로 내 돈입니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내 돈’은 단순한 ‘자산’이 아닌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나의 삶’을 위한 도구입니다. 1929년 ‘영국 여자'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바로 나만의 공간과 생활비죠. ‘내돈내삶’은 여성들의 재테크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과 관련한 소식, 정보 등을 전합니다. 그 두번째는 부동산 관련 강의로 여성의 자립을 돕는 공인중개사 서지유씨의 이야기입니다.
서지유 공인중개사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주변의 여성들을 돕는다. 부동산 세미나를 열어 그 수익금을 디지털성폭력 추방 단체에 기부했다. 2019년 10월 ‘여성트친(트위터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취방 구하기 세미나'를 시작으로, 지난해 1월 여성 공인중개사에게 배우는 ‘손해 보지 않는 부동산 계약법’, 그해 7월 ‘나를 지키는 부동산 계약’, 올해 1월 ‘부동산으로 자립하기' 세미나까지 진행했다.
30대 중반인 서 중개사의 강의를 듣는 이들은 주로 2030 여성들이다. 청년들을 위한 부동산 정책, 자취방 구하기 A-Z, 주택임대차보호법, 내집마련 계획세우기 등을 배우기 위해서다. 세미나는 5~6만원의 수강료를 받는데, 8명을 정원으로 해 40~50만원이 모이면서 중개사는 이 금액을 ‘DSO(디지털성범죄아웃)’, ‘엔(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등에 기부한다.
“이제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취방 계약을 하려는데 사기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약 과정은 어떤지 등을 알고 싶었는데 이번 세미나를 통해 자취 고민부터 미래 투자계획까지 대략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넓어진 것 같습니다. 삼천만원 열심히 모아서 찾아뵙겠습니다.(ㅋㅋ)” (세미나 참가자 ㄱ씨의 후기)
여성들에게 왜 집이 중요하냐면
23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지유씨가 운영하는 두드림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찾았다. 그에게 세미나를 통해 얻은 수익금을 디지털성범죄 추방에 쓰게 된 계기를 물었다. 언론에 기부 사실을 말하기 쑥스럽다며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디지털성폭력단체에서 일하는 지인이 있었어요. 단체들은 항상 어렵잖아요. 뭔가 내 방식대로 도움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세미나를 했어요.” 그는 세미나를 시작할 당시 자신의 메모장을 살펴보다 우연히 몇 년 전 적은 문구를 다시 보게 됐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여성을 돕는다.’ 서씨의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지금 주변을 도울 수 있는데 굳이 미룰 필요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죠.”
23일 서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에 내려 서씨의 사무실까지 걷는 길엔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두 집 건너 한 집’꼴로 즐비했다. 코로나19가 1년 넘게 기승을 부리는데 사무소 운영은 괜찮은지, 출혈 경쟁은 없는지 궁금했다. “저도 작년 초엔 코로나로 일을 못 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다행히 운이 좋아 잘 버텼죠. 다른 중개사분들과는 협력 관계에요. 공동 중개도 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죠.”
대학에서 부동산학과를 졸업하고 20대 초반이던 2009년에 공인중개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서씨는 2015년 관악구에 개인 사무실을 열었다. 2009년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서씨가 서울에서 첫 둥지를 튼 곳이 관악구다. “무엇보다 이 동네를 제가 정말 좋아해요. 평지인 데다 골목이 단정하고 도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요. 보라매 공원이 근처에 있고 동네에 ‘식물러’(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역시 식물러인 그에게서 동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공인중개사는 자신이 일하는 지역을 좋아해야 일이 돼요. 다른 동네에서 일할 땐 매물을 자신 없게 권할 때도 있었어요. 이 동네에 온 뒤로 손님들에게 자신 있게 매물을 권할 수 있게 됐죠.”
자립의 첫 시작은 집 마련 ‘계획’을 세우는 것
2019년 신림동 주거침입 미수 사건처럼 여성 1인 가구 관련 범죄 뉴스가 나오면, 방을 구하러 온 고객들로부터 “여기 안전해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서씨는 그럴 때 특히 안전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사전에 알아보고 제공하려 한다. 밤에 이동할 골목에 폐회로티브이(CCTV)가 있는지, 건물에 임대인이 함께 사는지, 건물 관리가 잘 되는지 구석구석 살펴본다.
하루는 고객 한 명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할 거처를 구하러 서씨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서씨 앞에서 펑펑 울어버린 일이 있었다. 원하는 주거의 조건을 목록으로 작성해온 고객은 볕이 잘 들고, 거실이 있었으면 했다.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주거 여건들이었다. 하지만 볕이 잘 들고 거실이 있는 집은 고객의 예산으로 구하기 어려웠다. 본인이 준비한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주거 여건이 생각보다 열악한 것을 알고 고객은 눈물을 보였다.
서 중개사는 예산이 적다고 좌절하기보다 자신의 주거 계획을 잘 짜기 위해선 현실에서 부딪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집은 옮겨가는 거예요. 처음에 원룸에 사는 게 왜 부끄럽나요. 그 다음에 거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시라 격려했죠.” 그는 부동산으로 자립하기 위한 시작은 ‘주거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지역, 현재 예산과 미래 예산, 자신의 특별한 상황 등을 고려해 계획을 짜는 게 자립의 첫걸음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계획을 마련한 뒤 살고 싶은 지역의 공인중개사를 찾아가면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것이라고 했다.
“의식주 중에 특히 ‘주'가 무척 중요해요. 보통 여성들에게 왜 집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냐면, 예전엔 경제적 자립은 여성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오던 시기가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성인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중 하나가 부동산이고요. 한 사람이 독립하고 자신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은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에 속합니다.”
여든살 할머니 공인중개사가 꿈
공인중개사로 일을 한 지 올해 12년이 된 서씨는 2015년 이전 직원으로 일할 땐 직업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 “20대 땐 몇 번이고 ‘일이 싫다’ 생각했어요. 다른 중개사의 사무실에서 ‘실장'으로 일했는데, 제게 반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6년 전 개인 사무실을 차린 뒤 알게 됐죠. 부동산 일이 싫었던 게 아니라 저를 함부로 대하는 게 싫었던 거였어요.” 서씨는 자기 사무실을 운영해 자립할 수 있게 된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자기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매물을 중개하며 가끔 옥상에 올라가 서울 전체 도심을 보면 그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는 서씨는 여든살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공인중개사로 일하는 게 꿈이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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