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8] 영란은행의 '오래된 저주'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2021. 2. 2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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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전에는 중앙은행이 민간기업이었다. 공산혁명 이후 설립된 소련중앙은행만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덴마크중앙은행은 1813년 국영기업으로 출발했다가 5년 만에 민영화되었다.

영국의 영란은행도 민간기업이었지만, 여느 기업들과는 달랐다. 정부를 쥐락펴락했다. 국내에서 처칠 재무장관을 압박해서 1925년 금본위제도를 복원시키는가 하면, 국제 무대에서는 1930년 국제결제은행(BIS)을 출범시키는 데 정부 이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돈의 힘이었다.

노동당은 그런 힘을 가진 영란은행에 거부감을 느꼈다. “돈은 국민의 주인이 아니라 머슴이 되어야 한다”는 링컨 대통령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국유화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과격한 사회주의식 발상이라고 외면받았다. 그러나 대공황이 닥쳐 1931년 금본위제도가 다시 중단되자 여론이 달라졌다. 민간기업이 법화를 발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노동당은 1945년 집권하자마자 영란은행 국유화부터 단행했다. 거기에는 몬터규 노먼 총재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작용했다. 그의 주장대로 금본위제가 재개되자 심각한 경제난이 찾아왔다. 처칠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러나 노먼 자신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대공황 때도 건재했다. 그의 조상들이 대대로 민간기업 영란은행의 주주였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도 총재였고, 할아버지는 51년간이나 이사회 멤버였다.

노먼은 노동당 집권이 확실해지자 24년간 지켜왔던 총재직을 사임했다. 그가 ‘국민 밉상'이 된 이유가 긴 재임기간 때문만은 아니다. 덴마크의 호프마이어는 29년간 중앙은행 총재로 일했지만, 미움받지 않았다. 귀족인 노먼의 문제는, 물가 안정만 중시하고 실업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과오였다.

3월 1일은 고용 안정에 무심했던 영란은행이 252년 만에 국유화된 날이다. 그 뒤로 영란은행은 정부에 순종했다. 지금 영란은행의 자율성은 다른 중앙은행들보다 훨씬 약하다. 세상 흐름을 모른 채 너무 오래 자리를 지켰던 노먼의 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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