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할머니의 꽃 그림

김선자 2021. 2. 25.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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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들은 다 배운 사람들인게 그라제. 우리는 벅군게 못혀” 마을 할머니들께 그림을 그리자고 했더니 한사코 못한다고 손을 내저었다. 먼저 한글 공부를 시작한 할머니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라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렸지만 자신들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 그림도 못 그리시겠다는 것이었다.

적적함을 달래기엔 그림만 한 게 없다고 할머니들을 설득하여 색연필을 쥐어 드렸다. 호미를 잡을 땐 다들 선수시더니 연필을 잡으면 손가락이 부들거리는 게 보였다.

일제강점기, 전쟁, 보릿고개를 함께 건너온 할머니들이 서툰 그림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귀해 보였다. 그 험악한 세월 동안에도 할머니들의 마음속에는 늘 꽃이 피어있었는지 할머니들이 가장 자주 그린 그림은 꽃 그림이었다.

“못 그리겄어.” 꽃을 그려놓고 색연필을 밀쳐놓는 할머니, 삐뚤빼뚤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자신 없어하는 할머니, 나무나 강아지를 그려놓고 나무 같은지, 강아지 같은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할머니, 알 수 없는 형체들 몇 개 그려놓고 ‘이게 뭔고’ 하고 생각하는 할머니, 처음 쥐어 본 색연필이 어색하여 한자리만 맴돌며 색칠하는 할머니....

“색깔을 참 잘 고르시네요, 동그라미가 독특해서 멋져요, 이렇게 나무를, 강아지를 그리니 새로운 것 같아요, 이 형체들 속엔 뭔가 숨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아요, 빈틈없이 칠하시니 색이 곱고 진해졌어요~”

할머니들의 그림을 보며 한마디씩 칭찬을 해 드렸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떨리는 것 아닌가. 연필을 쥐고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시도 자체가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

“워메 어째 그라고 잘 그린다요.” 할머니들도 서로의 그림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그림보다 다른 할머니의 그림이 낫다고 툴툴거리며 두 시간 동안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셨다.

일제강점기, 전쟁, 보릿고개를 함께 건너온 할머니들이 서툰 그림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귀해 보였다. 그 험악한 세월 동안에도 할머니들의 마음속에는 늘 꽃이 피어있었는지 할머니들이 가장 자주 그린 그림은 꽃 그림이었다. 이 이야기와 그림을 엮어 ‘꽃을 좋아한게 그림마다 꽃이여'(북극곰출판) 책도 냈다.

꽃피는 봄을 기다리며 볕이 따뜻해졌다고 마을 언덕배기로 산책을 다니는 할머니들의 걸음이 조금은 가벼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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