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동네 미용실, 집주인, 세입자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2021. 2.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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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마을의 일원이 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관심이 많다. 예를 들면 단골 미용실을 만들고 싶다. 미용실은 말하자면 나이와 젠더와 계급, 지역색 같은 온갖 조건이 교차하고 그에 따라 선택지와 결과물이 달라지는 전쟁터다. 나 같은 사람이 맘 편하기 쉽지 않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여기는 서울에서 살게 된 다섯 번째 동네다. 보수적이고 겁 많은 내가 가까운 역 근처 프랜차이즈 미용실부터 조심조심 시도해 보고 있을 때, 용감한 식구들은 ‘두발자유’라는 시원시원한 미용실에서 ‘투블록’을 치고, ‘뽀꾸레’라는 개성 넘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고 왔다.

그 스타일이 썩 마음에 들어 머리를 자르러 갔다. 자매가 미용실을 오래 같이 하다가 결국 동네로 이사까지 왔다는데, 나와 동행한 60세 중년 여성에게 “딸들 이런 머리 못하게 하는 엄마들도 있는데 생각이 너무 젊으시다”며 내 머리를 싹싹 밀어주는 바람에 그녀까지 덩달아 신나서 나랑 똑같은 데를 밀었다.

자신감을 얻어 주말엔 머리를 말러 갔다. 의자에 앉아 사진을 보면서 스타일을 협상하는 대신 “여기 오는 저처럼 ‘투블록’ 치고 머리 긴 남자애 아시죠? 걔처럼 말아 주세요” 했다. 원장님은 손끝으로 작고 빠르게 나선형 모양을 그리며 “아, 요렇게?” 하더니 자신감있게 7호 ‘롯드’를 꺼내들었다. 옥돌 미니 장판이 깔린 소파 위에서 열선 모자를 쓰고 앉아 나는 동네의 일원이 되어간다는 기분에 젖어갔다. 한 중년 여성이 문을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두 사람은 나를 두고 주거니받거니 했다. “여긴 학생이야” “20대?” “젊은 게 최고지!” 학생도, 20대도 아니고 나이 타령을 쳐내는 ‘자기방어’가 훈련된 편이지만 그날은 말 안 하고 생글생글 웃기를 선택했다. ‘진짜’ 동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주워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은 곧 미용실 앞까지 동네가 싹 다 밀리고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올 거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기 집주인 별로 없고 세입자들만 살아서 쉽잖아. 저긴 SH고.” 둘은 집주인이었다. SH 세입자인 나는 조용히 충격 받으며 소외되고 있었다. 공원에 천변에 근린시설 따로 지을 필요 없어서 최고란 얘길 들으면서, 나와 식구들이 좋아하던 것들이 수억원짜리 아파트 거주자들만의 것이 되는구나,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오리들을 보다가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좋고, 걸어서 전통시장 가는 것도 좋고, 미용실 호프집도 퍽 마음에 들어 임대 기간이 끝나도 여기 살아 볼까? 하던 차였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나는 이 마을에 오래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별로 집을 사고 싶지는 않다. 기껏 얻은 전세가 갭투기꾼 ‘깡통 전세’일까 불안에 떨고 싶지 않다. 투기 광풍에 올라타 집값 걱정하고 싶지 않다. 공공주택이면 족하다. 사회 보편의 합의 기준을 지켜 지어진, 상식적 규칙에 따라 무리 없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원한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선거철. 나를 대의할 후보가 없다. 마을의 일원으로 살기 어렵게 세팅된 ‘공동체’ 주택의 문제점을 정치인과 함께 풀어 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미용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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