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보다] 권력이 된 모든 A에게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2021. 2.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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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권력은 곧잘 자신이 낳은 무엇에게 잡아먹힌다 -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1819~1823).

얼마 전 한 행사에서 문화예술계 고위직에 있는 A와 우연히 한자리에 섰다. 줄곧 재야에 묻혀 살다 코드를 중시하는 정권 잘 만나 어느 날 갑자기 문화권력이 된 공인이다.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한때는 이런저런 주제 아래 수다까지 마다 않던 사이였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그래도 마음 한구석 나도 모를 옛정이란 게 남았었나보다. 막상 만나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게 됐다. 그러나 그는 보고도 알은척하지 않았다. 외면하는 눈빛은 싸늘했다. 반면 내 옆에 있던 예술인들에겐 친히 손을 내밀며 살갑게 예를 표했다.

A에게 난 그곳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그동안 난 여러 매체를 통해 그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노출된 절차의 불공정함을 지적했고, 배척하지 않은 그의 태도를 나무랐다. 세속적 욕망을 위해 식자로서의 소신과 절개를 내팽개친 진보의 위선을 꼬집었다.

그 배경에는 학창 시절부터 존경해온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놓여 있다. 언행불일치와 내로남불도 비판의 원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A는 일평생 누구보다 앞서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외쳤다. 말과 글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학연·지연이 판을 치는 예술계를 조롱했고, 반칙이 만연한 세상을 한탄했다.

하지만 권력이 될 기회가 오자 표정을 바꿔 스스로 정당성 부족한 권력이 됐다. 그건 평등과 공정이라는 우리 사회의 참된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진영에 따라 얼마든지 정의와 양심도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고, 그동안 쓰고 뱉은 책이나 말은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사투르누스의 형국과 진배없었다. 그러니 비판은 당연했다.

다만 열개의 긍정적인 문장보다 부정적인 단어 하나가 뇌리에 보다 깊이 각인되는 게 인간이다. 아무리 애정을 담은 글인들 반복되면 고깝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날의 무시는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향후에도 모든 A에게 난 투명인간이 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평론가로서 비판을 멈출 계획은 없다. 평론가란 본래 부당한 권력과 불화 관계에 놓이기 마련이고 당대 여러 난제들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물론 권력과의 불편함이 가중될수록 소위 출세와는 담을 쌓아야 한다.

상관없다. 난 내가 써야 된다고 판단되면 쓸 것이다. 비록 그 글들로 인해 더 많은 이들과 이별한다 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문제적 상황은 바뀌어야 하고 장관, 기관장 할 것 없이 A 같은 경우는 더 이상 나오면 안 된다. 부당함과 부조리함이 합당한 결과를 가로채는 사회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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