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부사의 운명

오은 시인 2021. 2. 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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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출근시간대에 버스를 탔더니 만원이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잔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반사적으로 안간힘이 느껴졌다. 더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찬 느낌, 한도까지 끌어올리는 기운 말이다. 잔뜩 밀린 일, 잔뜩 화난 얼굴, 잔뜩 짊어진 짐 같은 것이 떠올라 도리질을 쳤다. 된소리가 있어서 그런지 발음할 때부터 잔뜩 힘이 들어가게 되는 단어다. 버스에서 내릴 때 어느새 나는 부사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오은 시인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을 보니 불러 세워도 대답이 없을 것 같다. 그 사람이 멈추었다면 나는 분명 툭 쏘아붙였을 것이다. 묵었던 감정이 툭 터지기라도 하듯, 공격적인 말들이 사정없이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툭’과 ‘툭’이 만나 오래된 기타 줄처럼 툭툭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했다. 앞에 놓인 테이블에 홈이 패어 있었다. 움푹 팬 것을 보면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대체 무엇에 쓸린 것일까, 아니면 누가 일부러 파낸 것일까. 남지 않는 자국의 사연은 또 얼마나 기구할까. ‘움푹’이라는 부사는 왜 패고 꺼지고 들어가는 동사와 만날까. 왜 발음하는 순간 번번이 슬퍼지고 말까. 거울을 보니 두 눈이 떼꾼했다. 움푹 들어간 눈을 보니 어젯밤 잠을 설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몸은 좀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업무 때문에 만난 분은 친절했다. 정확히 해야 할 말만 전달하며 상대와 거리감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인 게 분명했다. “신경 쓰실 일이 많지요?”라고 물었더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 바람에 몇 년 사이 폭삭 늙어버렸지요.” 나는 ‘폭삭’이라는 부사에 마음이 주저앉고 말았다. 가라앉고 부서지고 기력이 쇠하는 부사, 폭삭. 폭삭 망할 수는 있어도 폭삭 흥할 수는 없다. 폭삭은 아래를 향해 있는 단어다.

“오늘 참 좋았습니다.” 상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어릴 적에는 ‘참’이라는 부사를 참 많이 썼었다. 일기의 마지막 문장에 으레 ‘참’이라는 부사가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참 즐거웠다, 참 재밌었다, 참 맛있었다, 참 행복했다…. 무의식중에 일종의 ‘참 효과’를 노렸던 것 아닐까. 이 일기에 쓰인 내용이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선생님이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저도 참 좋았어요.” 참에는 참으로 응대해야 한다. 진심은 그렇게만 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온종일 만난 부사들 덕에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매일 사용하지만, 같은 이유로 별생각이 들지 않는 게 바로 부사다. 뜻을 분명하게 하는 데 기여하지만, 없어도 문장을 해석하는 데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품사다. 삶을 이끄는 것은 동사지만, 삶의 곳곳에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부사 같다. “나는 네가 좋아”보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라는 말이 더욱 강력한 것처럼 말이다. 단어는 뜻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바대로 묵묵히 자신의 소용을 다한다. “난데없이”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데려오고 “반드시”는 발음하면서 의지가 더욱 단단해진다.

일상에서의 쓰임 때문에 운명이 달라진 경우도 있다. ‘너무’라는 부사가 그렇다. 이 단어는 본디 “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이었다. 언뜻 느끼기에도 부정적 의미가 가득 담긴 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좋다” “너무 맛있다”처럼 긍정의 상황에서도 ‘너무’를 사용한다. 2015년 2분기에 너무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라는 뜻의 외연이 넓어졌다. “너무 예쁘다”와 “너무 싫다”를 모두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의 마지막에 만날 부사가 ‘결국’이 아닌 ‘마침내’이기를 바란다. 결국은 닥치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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