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필품 공짜로 준 마트… 텍사스 주민은 추위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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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현지 시각) 기록적 한파와 정전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미국 텍사스 오스틴의 한 대형 식료품점. 추위와 배고픔에 떨다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정신없이 물건을 담는데 갑자기 매장의 전기가 끊겼다. 계산대의 카드 단말기까지 꺼진 것을 보고 사람들은 ‘쇼핑을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빵과 우유, 기저귀로 가득 찬 쇼핑 카트들이 줄줄이 계산대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오늘은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니 집으로 빨리 안전하게 돌아가시라”고 안내한 것이다.
손님들의 제보와 휴스턴 크로니클 등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얼떨결에 밖으로 나온 몇몇 고객은 서로 쳐다보다 하나둘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어 빙판이 된 주차장에서 다른 사람이 흘린 물건을 주워주고 차를 밀어주는 등 서로 돕기 시작했다. 고객들은 며칠 후 이 식료품점에 물건값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업주가 사양하자 수백달러씩 이 업체 이름으로 불우 이웃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 업체는 H-E-B라는 텍사스의 116년 된 수퍼마켓 체인이다. 1905년 설립돼 텍사스주에 340개 지점을 운영하는 가족 기업이다. 텍사스에서만 주민 10만여명을 고용하고 수익 상당 부분을 지역사회에 환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한파로 대규모 식수·식량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이 업체는 자체 생산·유통망을 풀가동해 생수와 음식, 생필품을 평소보다 싼 가격에 공급했다. 대량의 식료품을 긴급 구호센터에 무상으로 갖다주는 등 ‘주민 구호 작전’에도 적극 동참했다.
현재 텍사스의 한파는 물러갔지만 아직 수백만명이 전력난과 식수난을 겪고 있으며, 주택·공공 인프라가 붕괴되다시피 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23일 보도했다. 자존심 강하고 독립적인 텍사스 사람들은 60여명이 숨진 이번 후진국형 사태로 기본적 존엄조차 무너지게 되자 “우리는 저주받았다”며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특히 비상사태에도 식수조차 공급 못하는 무능을 드러낸 주(州)정부, 휴양지 캉쿤으로 가족과 함께 도피했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같은 정치인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텍사스의 일부 전력업체는 전력 수급 불안을 틈타 가구당 수천만원의 전기료 폭탄을 부과하는 일도 일어났다. 논란이 된 전력업체의 임원진은 23일 사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수퍼마켓 체인의 감동적인 활약상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열광하고 있다. 텍사스 주민들은 “우리를 버리지 않은 건 HEB뿐” “HEB가 주정부 운영을 하라”고 말할 정도로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학자들은 정치 리더십 공백을 채우고 나선 이 가족 기업을 ‘도덕적 중심(moral center)’으로 표현한다고 NYT는 전했다.
HEB는 지난해 코로나 발발 초기에도 우왕좌왕했던 정부와 달리, 15년 전 조류 독감 유행 때부터 자체적으로 만든 ‘팬데믹 대응 매뉴얼’을 전파해 주민들에게 거리 두기와 손씻기를 안내하고 사재기를 하지 않도록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번에도 텍사스 주민들은 정부가 아닌 HEB 홈페이지에서 날씨와 생활정보를 얻고 있다.
텍사스 비상사태가 낳은 ‘영웅’은 또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23일 가정마다 수도·하수관이 얼어터져 극심한 고통을 겪는 가운데 배관공들이 영웅·구세주 대접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배관 수리 요청이 폭발해 쪽잠을 자야 할 정도로 예약이 밀렸지만, 수리 비용을 과다 청구하지 않고 겁에 질린 노인들을 위로하며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사회를 떠받치는 블루칼라 직종에 대한 존경심도 높아지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뉴욕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31) 민주당 하원의원이 텍사스 주민을 위한 모금을 벌여 500만달러(약 55억원)를 모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카시오코르테스는 급진 진보 좌파를 상징하는 정치인인데, 보수 텃밭인 텍사스의 푸드뱅크에 달려와 봉사 활동을 하면서 “이것이 뉴욕의 정신, 텍사스의 정신, 미국의 정신”이라고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는 오는 26일 텍사스를 방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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