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떠난 첫사랑에게 쓰는 편지..남은 자들의 추억 그리고 현실
[경향신문]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가 현재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는 한 통의 편지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약혼자의 2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그의 옛주소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리운 마음에 안부 편지 한 통을 보낸다. 하지만 이 편지를 받는 것은 약혼자의 중학교 동창이자 동명이인인 한 여성, 후지이 이쓰키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생전 품었던 마음들에 대해 알게 되고, 사랑과 관련된 기억들이 다시 쓰여진다.
24일 개봉한 이와이 감독의 신작 <라스트 레터> 역시 이미 세상을 떠난 이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리(마쓰 다카코)는 이미 세상을 떠난 언니 미사키의 동창회에 부고를 전하러 갔다가 교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를 만난다. 교시로는 언니의 대학 시절 연인이자, 유리가 한때 짝사랑했던 선배다. 동창회장에서 유리는 모두에게 미사키로 오해받으면서 정작 부고는 전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교시로 역시 유리를 미사키로 오해하고 연락한다. 유리의 휴대폰이 고장나면서 교시로와 유리는 손편지로 연락을 주고받게 된다. 미사키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미사키와 얽힌 사람들은 편지를 통해 그녀와의 추억을 다시 불러내 교환한다.
<러브레터>(1995)와 <라스트 레터>(2020) 사이에는 25년의 간극이 있지만, 두 영화는 편지와 첫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여러 명이 서신 교환을 통해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망자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추모하게 된다는 점, 여주인공이 1인 2역이라는 점도 같다. 이야기 배경과 구조가 대구를 이루기도 한다. <러브레터>에서는 겨울, <라스트 레터>에서는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이 강조된다. <러브레터>에서 편지를 읽고 쓸 때는 눈바람 소리가, <라스트 레터>에서는 여름 벌레 소리가 인상적으로 들려온다. <러브레터>에서는 남겨진 여자가 세상을 떠난 남자의 첫사랑 기억을 들여다봤고, <라스트 레터>에서는 그 반대다.
하나 두 영화는 마냥 비슷하지만은 않다. <라스트 레터>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겪은 25년의 세월만큼 더 깊이감이 있는 영화다. <라스트 레터>는 그저 첫사랑의 기억을 좇으며 그리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지난 삶을 다시 들여다본 후, 현재의 삶을 직시하는 듯하다. 제대로 된 애도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법이다. <라스트 레터>는 마냥 풋풋한 영화가 아닌, 한 편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이와이 감독은 왜 한 번 더 편지를 중심 소재에 뒀을까. 지난 17일 열린 국내 시사회 후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이와이 감독은 “저는 학창 시절부터 편지가 아주 일반적인, 러브레터로 마음을 전하던 시대를 보내왔다”며 “20대 중반부터 언젠가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러브레터>는 손편지가 일반적인 시대라서 현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로 편지를 치도록 했고, 이번에는 정말로 손편지를 쓰는 영화를 만들게 됐다”며 “우연이지만 제 인생에서 영화라는 것을 통해 편지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라스트 레터>는 이와이 감독이 2017년 한국에서 배두나·김주혁과 함께 촬영한 <장옥의 편지>가 단초가 돼 발전됐다. 이와이 감독은 “한국의 겨울이 그렇게나 추운 줄 모르고 얇은 옷을 입고 갔다가 첫날부터 감기에 걸렸지만 짧은 촬영에도 즐거운 경험이었고, 그게 부풀어 올라 지금의 <라스트 레터>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또 “저는 그런 식으로 하나의 작품이나 생각이 점점 부풀어 오르게 되는 경험과 세계를 매우 좋아하고, 만끽한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는 미사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미사키>가 등장하는데, 이미 한 권의 <미사키>를 완고했다. 이와이 감독은 “미사키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쓴 것인데, 언젠가는 이것도 영화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이 감독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러브레터>는 한국에서만 무려 다섯 번이나 개봉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와이 감독은 “18세 때부터 영화를 찍었고 <러브레터>는 프로가 된 후 5년 정도 됐을 때 만든 작품인데, 영화인으로서의 여정에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첫 장편 영화가 이렇게나 성공하고 사랑받은 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러브레터>는 마치 제가 구름 위에 붕 뜬 느낌이 들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나는 성령의 종 다윗”···‘그루밍 성범죄’ 혐의 목사, 복종 교리 강요
- 이준석 “검찰 인사, 마지막 몸부림···T(탄핵) 익스프레스”
- [종합]“팬들에 돈달라 하겠냐” 길건·홍진경도 분노···끊이질 않는 사칭범죄
- 안철수 “‘채 상병 특검’, 거부권 행사 않고 ‘그냥 받겠다’는 게 정정당당한 태도”
- ‘부처님 깜놀하겠네’···내일 천둥·번개·돌풍·싸락우박 온다
- 사측이 “조수빈 앉혀라”…제작진 거부하자 KBS ‘역사저널 그날’도 폐지 위기
- 이원석 검찰총장 “인사는 인사, 수사는 수사”…사전 조율 여부엔 “말 않겠다”
-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②] 이남순 “여자로서 끝났다” 몸도 마음도 깊숙히 꿰뚫은 그날의 상처
- 늙으면 왜, 다들 손만 잡고 잔다고 생각할까
- “태국 파타야 한인 살인사건 용의자, 캄보디아 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