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니하오 차이나] 미얀마 쿠데타에 미소짓는 중국

박영서 2021. 2. 2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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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서 논설위원
박영서 논설위원

지난 2월 1일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에선 오전 10시부터 미얀마의 국회에 해당하는 연방의회 하원이 개회될 예정이었다. 작년 11월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이 처음 소집되어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날 새벽 이 나라 최고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비롯해 윈 민 대통령과 각료들, 정당지도자들이 미안마 군에 의해 구금됐다. 이어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권력을 쥐게 됐다.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새벽의 쿠데타는 피 흘리지 않고 성공했다.

쿠데타 이후 국내외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미얀마 국내에서 반(反)쿠데타 시위는 유혈충돌로 번지면서 최악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국제사회는 "민주주에 대한 공격"이라며 제재카드를 꺼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흑막설'이 돌고 있다.

중국에 의심의 눈초리가 가는 이유는 쿠데타 발발 보름 전인 지난달 11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미얀마를 방문해 수치 여사는 물론,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킨 흘라잉 최고사령관도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 외국사절단을 만난 마지막 자리였다. 서방언론들은 그 자리에서 미얀마 군부가 중국 측에 쿠데타 실행 의사를 넌지시 알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쿠데타 직후 발표된 중국 외교부의 관련 성명도 미온적 내용이어서 '중국 흑막설'을 더욱 부추겼다.

이렇게 흑막설이 나올 정도로 미얀마 군부와 중국의 사이는 좋은 편이다. 1988년 8월 8일 미얀마에서 터진 이른바 '88항쟁'은 양국 관계가 강력해진 계기였다. 그날 군부가 양곤 등지에서 벌어진 반군부독재 시위를 무력 진압하면서 국제사회의 제재가 시작되자 양국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는 와중에도 미얀마 군은 전투기, 대함미사일 등 상당 분량의 무기를 중국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미얀마 군이 과도한 '중국 의존'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미얀마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 세력들이 꺼림직한 존재다. 수백명의 화교들이 살해당하고 10만여명의 화교들이 추방당했던 1967년 미얀마 반중(反中) 폭동은 이 나라에 반중 정서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미얀마 군은 북쪽 국경 소수민족 무장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이 지역은 마오쩌둥(毛澤東)주의를 주창하는 버마 공산당이 소수민족들과 손잡고 반정부 무장투쟁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물적·인적 지원을 받았던 버마 공산당은 미얀마 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7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이 버마 공산당 지원을 철회하면서 두 나라는 비로소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이런 점을 본다면 중국이 배후에서 이번 쿠데타를 조종했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군정 부활로 세계 각국이 제재를 발동해 미얀마가 고립된다면 중국에겐 기회가 된다. 아마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이번 쿠데타를 계기로 미얀마 이권을 확실히 다지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 측에서 보면 미얀마는 인도차이나반도를 경유해 인도양으로 나가는 루트상에 위치하고 있다. 미얀마 루트를 이용하면 위협요인이 많은 말라카해협을 거치지 않고 중동에서 원유, 천연가스를 실어 나를 수 있어 에너지 공급이 원활해진다.

게다가 미얀마를 깊숙이 파고들면 중국이 내세우는 일대일로(一帶一路)에 있어서도 중요 성과가 되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구상을 통한 미·일·호주의 대중 포위망에도 큰 구멍이 뚫린다. 중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일석삼조인 셈이다.

반면 바이든 정권은 딜레마다. 미얀마를 강경하게 압박하면 미얀마는 중국과 더 밀착해 버릴 것이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민주주의와 인권에 주안점을 두는 외교정책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흔들거리기 때문이다. 결국 미얀마 쿠데타는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견제' 아시아정책의 첫 시험대가 되는 셈이다. 딜레마에 빠진 바이든 정권을 지켜보는 중국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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