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아메리카의 추억 / 류웅재

한겨레 2021. 2. 2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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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웅재ㅣ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유년 시절, 내게 미국은 인류가 직조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였다. 드보르자크가 19세기 말 뉴욕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체코인으로서 미국 원주민과 흑인 음악에서 얻은 영감을 고향의 민요와 융합해 작곡한 <신세계 교향곡>이 신대륙과 보헤미안의 정서를 혼종화한 기념비적 음악이 되었듯, 미국은 어린 내게 세상의 이질적인 것들을 ‘용광로’ 속에서 녹여내 새로운 형태로 형질 변화시키는 신세계처럼 보였다. 할리우드 영화, <초원의 집>이나 <보난자> 같은 티브이 드라마, 재즈나 아메리칸팝 등 막강한 문화산업 외에, 길지 않은 역사이지만 남북전쟁과 세계대전 등 굵직한 현대사를 관통하며 링컨과 루스벨트, 케네디 등 위대한 대통령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특히 아버지가 구해다 준 미국 동북부 한 도시의 도록은 어린 내게 큰 충격을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책의 만듦새, 종이의 질과 컬러사진의 선명함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완벽하게 정비된 도시의 정경,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무수한 자동차들, 차고가 딸린 아름다운 주택들,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들, 긴 시계탑이 솟아오른 캠퍼스,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보하고 잔디에 누워 책을 읽거나 토론하는 대학생들, 이 모든 것은 많은 것이 결핍 상태였던 조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낙원 같은 세계의 풍경이었다.

오래전 미군 부대에서 얻어 마신 오렌지주스에 대해 맑은 유리잔에 담긴 노란 색깔의 주스가 평생 보지 못했던 빛깔이고 맛이라 무슨 하늘나라 음식을 먹는 기분이었다 회고한 한 노학자의 말은, 많은 한국인들이 과거, 그리고 오늘날까지 미국이란 나라를 상상하는 한 방식을 보여준다. 몇해 전 아메리카노 논쟁에서 드러나듯 차가운 이성으로 반미를 외치거나 미국이 투사하는 부박한 삶의 양식과 정서 구조를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일지라도, 미국이 전해준 위대한 유산, 이를테면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현대사, 즉 미완과 질곡의 연속이었음에도 이뤄낸 빠르고 눈부신 성취와 집합적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기에.

그런데 알다시피 이러한 우리의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들이 최근 잦아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과 인종주의와 혐오에 기반한 통치, 지난해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나는 숨을 쉴 수 없다’며 죽어간 조지 플로이드와 그가 촉발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부터, 올해 초 조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을 의회에서 공식 확정하는 순간,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습격 사건은 우리가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차이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또는 어떤 관대한 기준으로도 수용하기 어려운 사건들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초유의 의사당 난입 사건 후, 영어로 ‘워싱턴디시(DC)에서 발생한 일은 결단코 미국이 아니다’라 일갈했다.

얼마 전 미국 상원에서 열린 탄핵심판 표결에서 유죄 평결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탄핵을 피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 재개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나 이른바 ‘트럼프 이후의 트럼피즘’은 건재하고 이는 오늘날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혐오와 배제, 신인종주의를 숙주로 한 극우 정치집단의 부상과 소외된 대중의 공명은 탈진실의 시대, 다양한 매체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음모론과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미국이 인류사에 남긴 유산을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부합하게 성찰과 시행착오를 통해 벼리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도 있지만 역사의 변화와 부침에 의해 곳간이 조금 비워지더라도, 맹목적인 혐오와 불신의 벽을 넘어 차이에 대한 관용, 타자와 공존하는 도량 있는 사회와 공동체적 삶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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