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집' 이현석 "큰 사건도 결국 개인이 당면한 문제였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일부러 사회적 이야기를 쓴다기보다 그것도 결국 개인이 당면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쓰는 것이죠. (사회적 이슈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제가 공력이 짧아, 잘 몰라서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해요. 큰 사건들이 저도 비켜나갈 수 없는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요.”
--표제작 「다른 세계에서도」를 보면 주인공인 나와 동생 해수, 선배 희진 등이 낙태 및 낙태 금지의 윤리성 문제를 다층적으로 탐색하는데, 의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낙태 문제를 다룬 것인가.
“저는 ‘현장에서 경험한 건 써선 안된다’는 주의이고, 산부인과 의사도 아니다. 헌재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앞두고 주변의 동료 의사들과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하는 분들의 얘기를 들으며 고민하게 됐다. 사실 현장에서 비롯된 내용은 많지 않다. 다만 의학 지식을 사용하니까 실감으로 다가온 게 있지만, 소설 「그들은 정원에 남겨두었다」에서 밝혔듯이, 제 자신의 현장과 선은 긋고 창작을 해야 한다.”
--작품에서 제기한 동성애 연인에 대한 처우를 담은 ‘생활동반자법’이나 사건의 재현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답을 내려고 했다면, 특정한 사안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는 성향의 사람이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소설에서 답을 내려 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소설가들과 마찬가지로, 예민한 문제를 건드렸을 때 단순하게 이것저것 말하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실패가 됐든 성공이 됐든,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돌려차기를 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과거에 외면했던 것을 털어내기 위해 시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닌가. 많은 이들이 살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돌려차기를 통해 한 번이라도 자신의 정의를 이루려 하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실패한 돌려차기가 아니다. 한 평론가가 ‘영웅 서사’도, ‘반영웅 서사’도 아닌 ‘미(未)영웅 서사’로 조한흠을 호명했는데, 공감한다.”
단편 「부태복」에선 북한 의사 출신 부태복이 임진강을 건너 귀순한 뒤 의료현장에서 남한 의료 시스템과 미묘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도 다뤄진다.
--부태복의 직감에 의한 진단 의료와 양진석의 이성과 시스템 의료가 대비되는데, 두 영역이 어쩔 수 없이 부닥친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의료계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이 생기면 문제가 될 수가 있다는 경고가 누적돼 왔었다. 북한에서도 사스가 창궐했을 때 정확히 진단이 되지 않는 채 유행이 지나갔다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사스 비슷한 것을 상정하고 글을 썼다. 만약 전염성이 강한 병이 된다면, 파국적인 상황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역사회에서 퍼지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 파국으로 생각하지 못하다가 이젠 파국이라고 생각하더라. 우연이긴 하지만, 의료계에서 코로나에 대한 경고는 계속 쌓여왔기에 우연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작품 「컨프론테이션」은 30대의 이정민과 김한서 두 변호사가 미술 작품을 배경으로 법조와 사랑, 젠더 문제를 유려하게 풀어냈는데.
“이 작품은 사랑의 계급성이나 시장화된 이성애를 생각하며 썼다(이와 관련, 그는 책 뒤편에 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와 『사랑은 왜 아픈가』 등을 바탕으로 했다고 적었다) 둘은 이미 어느 정도 축적을 기반을 가진 30대 중반으로, 이쯤 되면 순수한 사랑이 남아 있다기보다 서로 계산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젠더 위계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소설에서 한서는 사내 변호사 공모에 정민에게 “네가 얼마나 원하는지 아는데 내가”라며 응모하지 않겠다고 밝힌다. 정민은 이에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긴 해”라며 젠더의 위계를 드러냈다고 분개한다. “갑작스레 밀려든 모멸감에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열이 끓어올랐고 얼굴이 화끈거렸다…헛웃음이 튀어나온 나는 몇 번인가 끊어 웃다가 그게 무슨 개 같은 신사도냐고, 넌 나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며, 이러면 내가 좋아하기라도 할 줄 알았냐고 언성을 높였다.”(174쪽)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의사나 연구자, 변호사, 조교 등 다양한 분야의 현실적 인물들이 나와서 더 풍성한 느낌인데.
“오히려 제 한계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저로부터 멀어지고 타인으로 이입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장르인데, 저는 아직까지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만 개의 직업이 있다면 의사나 기자, 변호사 등은 굉장히 소수다. 오히려 저는 변두리와 변방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제가 지근거리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는데, 앞으로 계속 멀어지는 작업을 하고 싶다.”
요컨대, 젊은 작가 이현석의 소설은 입체적인 인물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잘 교직해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질문을 호소력 있게 던지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어쩌면 내면을 파고드는 수직적 영역에 더해 사회와 세계로 확장해가는 한국문학의 수평적 영토 확장의 선봉에 선 다비드군단 전사를 목도하고 있는 지도. 1984년생 현직 의사 출신인 이 작가는 만 33세이던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어떤 계기로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평범하다. 그냥 책 읽는 것 좋아하고 자연히 글쓰기는 것도 좋아했고 번역이나 짧은 글도 쓰기도 했다. 졸업하고 일하면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잘 쓰이지 않더라. 친구가 글쓰기 워크숍을 하는데, 함께 하게 됐다. 간단하게 그때 있었던 일을 썼는데, 친구가 ‘소설로 확장해도 재밌을 것’이라고 해 2016년 여름부터 주말 창작아카데미에 가게 됐다. 소설은 기술적으로 안다고 해서 써지는 것도 아니지만, 아카데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다. 그때 전공의 레지던트였는데,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많아 주말의 위안이었다. 작품 하나를 써서 가져갔더니, 사람들이 ‘괜찮네’ 하고 좋은 반응을 보여 용기를 내 투고했다. 많은 분들이 고생하고 있지만 너무 쉽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 지면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써왔다.”
--지난해엔 촉망 받는 젊은 작가에게 주는 ‘젊은작가상’까지 수상했다. 재능이 비범한 것인가, 노력의 산물인가(수상 당시, 그는 “관념과 실감의 충돌 속에서 어느 쪽에도 함몰되지 않으려는 안간힘”(소설가 권여선)으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읽어내는 힘”(소설가 오정희)을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았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운이라는 게 결국 자신이 가진 사회적 자본이나 환경의 다른 말이다. 산재를 당한 사람들은 ‘운이 나빴다’고 얘기하지만, 이 사람들 역시 사회적 배경이나 환경 등에 의해 그들의 운이 결정된다. 저의 경우 언어에 익숙해지고 많은 전문 지식 등 좋은 여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주변 환경이 좋아서 그런 것으로, 운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저에게 주어진 특혜이나 특권 등을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작가들처럼 빨리 써내지 못하는 것 같다. 쓰는 게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고, 다른 취미도 없다. 퇴근하고 힘이 조금 남는 날은 한두 시간 쓴다. 이렇게 말하면 매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주말에는 당직을 안서니까 여건이 되면 서너 시간씩 쓴다. 다행히 요즘 문예지 등에서 청탁을 6개월 전에 미리 하는 편이어서 쓸 수 있겠다고 하면 천천히 쓴다. 1년에 3편 이상 쓰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1년에 2편까지가 적당한 것 같다. 요즘 겸업하지 않는 소설가들은 극히 드물다. 대작가가 돼도 먹고 살지 쉽지 않으니까. 그래도 좋아하는 것 한다고 하면 힘들지는 않다.”
--작품 속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는데, 취재는 어떻게 하는가.
“보통 책을 읽는다. 오탈자를 신경 쓰듯이 사실 관계를 파고들면 실감이 생기는데, 저는 (사실 관계를) 파고들어 실감 있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글 쓸거리를 다 찾아놓는 다음에 쓰는가, 아니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는가) 다 찾아놓은 다음에 플롯을 거의 다 완성하고 마지막 인상적인 장면이 떠올라야 초고를 쓴다. 자료를 찾고 구상하고 플롯을 짜고 마지막 장면이 나와야 쓴다.(글을 쓸 때 습관 같은 게 있는가) 퇴근하고 써야 하는데, 바로 쓸려고 하면 힘들다. 그래서 보통 30분 정도 땀을 빼거나 아니면 30분 정도 자고 일어난다. 퇴근하고 나서 이전 모드를 바꿔줘야 한다.”
10년 후의 모습이나 소설가로서의 포부 등을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지금처럼 일하면서 딱 이 정도라도 꾸준히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설 세계에 대해선 거창한 것이 없어서, 저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대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현석은 그렇게 일과 창작 사이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채 저 멀리 어딘가에서 한국문학의 영토를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지치지 않고 끊기 있게.(2021.2.23)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자음과모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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