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전 서라벌에서도 '메이드 인 로마'는 명품이었다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유리 유물 1만8천여점 전시
신라인이 금보다 높게 친 지배층 문화 '로만 글라스'
지중해~흑해~중앙아시아 초원길 거쳐 만주·한반도로
1600여년 전, 신라 경주에선 ‘메이드 인 로마’가 최고의 명품이었다는 것을 아시는지.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신라인이 등장하는 실크로드 역사의 꿈결 속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철기시대~통일신라시대 2000여년간 한반도 곳곳에서 출토된 구슬과 그릇, 불교 공양구 등 각양각색의 유리 유물 1만8000여점을 엮은 전시는 진기하고 놀랍다. ‘2000년 제국 로마’의 수출품이 ‘1000년 왕국 신라’의 지배층을 결속하는 상징물이었다니!
핵심 주역은 이른바 ‘로만 글라스’로 이름 붙여진, 제국 곳곳의 공방에서 만들어 수출한 유리잔과 그릇이다. 초원길 교역품으로 들어온 로만 글라스를 신라인은 금보다 더 높게 쳤다. 임금과 왕족이 독점하고자 기를 썼던 희귀 명품이고, 죽어서 묻힐 때 선호하는 부장품이기도 했다.
국내외 고고학계에선 1920년대와 70년대 경주의 대형 고분 발굴과 연구 성과를 토대로 로마산 제품이 4~5세기 신라 경주에 들어와 크게 유행했다는 결론을 최근 잇달아 내놓고 있다. 확실한 증거가 전시장 네번째 영역인 신라 능묘의 유리 출토품 진열장에 나타난다. 황남대총, 천마총, 금령총 등 경주 7개 왕릉급 고분에서 로만 글라스 계통의 그릇, 주전자, 잔 등이 15점이나 나왔다. 1973년 천마총에서 나온 코발트빛 유리잔과 1975년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오이노코에’란 이름의 봉황 머리 모양(봉수형) 유리병이다. 옛 로마 권역을 제외하면 단연 압도적인 물량이다. 지난 수년간 한국 국립박물관과 일본의 실크로드 전문가들이 이 로만 글라스의 성분과 형태를 분석하고 이동 경로를 문헌과 유사 유물을 통해 추적했다.
분석 결과, 천마총 유리잔은 지중해변 이집트의 나트륨 성분을 머금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물관 쪽은 황남대총 봉수형 유리병이 중앙아시아산일 가능성도 제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병은 흑해 크림반도 케르치와 지중해변 시리아 출토품 두 점밖에 없다. 지중해~흑해~중앙아시아 초원길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쪽에 더 심증이 갈 수밖에 없다.
로만 글라스는 경주 외엔 합천 옥전 고분을 빼놓고는 한반도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배층끼리만 공유한 외래 문물인 것이다. 신라 지배층은 고유의 무덤 방식인 돌무지덧널무덤과 북방 민족 특유의 취향이 깃든 금관 등의 황금 장신구, 로만 글라스란 세 가지 문물을 통해 정체성을 되새김질하며 결속했다. 유리제품 제작지가 어디였는지도 상상력을 돋운다. 학자들은 지중해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와 알프스 이북의 식민도시 콜로니아(독일 쾰른), 동지중해 연변의 시리아 팔미라(현 타드무르), 에게해에 접한 그리스 테살로니키 공방 중 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거기서 1만㎞에 가까운 여행을 해 경주에 안착했을 것이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뒤 마지막 통일제국 황제인 테오도시우스가 두 아들에게 동서로 제국을 나눠 주던 시기의 교역물인 셈이다.
전시의 또 다른 주역은 1만4000점이 넘는 유리구슬이다. 기획진은 한반도 유리의 시원으로 일컬어지는 청동기시대 부여 송국리, 보령 평라리 유적의 대롱 구슬 출토품과 더불어 98년 전 경주 식리총에서 발굴됐으나 한 번도 전시되지 않았던 이중 원형 무늬의 페르시아산 추정 구슬을 처음 공개했다. 한반도산 고대 유리 유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슬류의 주종이 알이 작고 적록황색을 띠는 인도-태평양(동남아)계 유리임을 보여준다. 로마와 통하는 인도의 남쪽 항구 파타남과 아리카메두 등에서 동남아~중국~한반도로 가는 유리구슬 교역로가 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원 전후 시기 고대 한반도 유리구슬을 처음 한데 모은 대형 진열장에는 적갈색이 많은 마한계 구슬과 청색 계통의 마노·수정 등이 함께 나오는 변한·진한계 유물을 나란히 배치해 지역별 유리구슬의 특징까지 일별할 수 있게 해놓았다. 이 특징은 나중에 백제, 가야, 신라로 고스란히 계승되는데, 삼국시대 구슬 목걸이와 장신구, 사람 얼굴 들어간 상감구슬 등을 통해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삼국시대 유리는 초원길로 들어온 로만 글라스 계통이 주종이고, 유리구슬은 해상 실크로드로 들어온 인도-태평양계 유물이 절대다수임을 전시는 드러낸다. 고대 한반도인이 육·해로를 통한 글로벌 교역에 열려 있었고, 이런 의식이 사리병 등 불교 공양구의 제작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국내 출토된 구슬의 본산지와 유리 유물의 전파경로에 대한 상세하고 입체적인 설명이 허전한 대목으로 남지만, 로마·인도·한반도의 육·해상 교류사를 색다르게 짚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전시라 하겠다. 4월11일까지.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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