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다하겠다는 자신감.. 방호복 입어보니 반나절만에 흔들렸다"
대구·경북에서 코로나 1차 유행이 한창이었던 작년 3월, 대구 의료원에 파견돼 코로나 환자를 간호하던 이학도(30) 간호사의 양손에서 돌연 피부가 한 겹, 두 겹 벗겨지기 시작했다. “환자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손이 엉망이 됐더라고요. 손 소독을 자주 하고 보호장갑을 겹겹이 껴서 그런 듯한데, 피부과 선생님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쓰라린데 피부가 너무 벗겨져서 머리를 제대로 감기 어려웠죠.”
이 간호사에게만 나타난 증상은 아니다. “다른 간호사 한, 두 분도 저랑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었어요.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도 매일 손 소독을 하고 장갑을 껴야 하니 다들 치료는 단념하고 환자를 간호했죠. 지금도 같은 고통을 겪는 간호사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이 간호사의 손은 대구 파견 근무가 끝나고도 수개월이 지난 작년 6월 말쯤에야 회복됐다.
국내 코로나 사태 발생 401일째인 23일, 대한간호협회가 코로나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간호사들의 체험 수기 ‘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를 발간했다. 엉망이 된 이 간호사의 손은 속표지 사진으로 실렸다.
◇”레벨D 방호복, 살면서 경험한 것 중 가장 힘들어”
이 간호사는 “감염 방지를 위해 레벨D 방호복을 입는 고통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정말 앞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라고 했다. 수기에서도 방호복을 입는 간호사들 고충은 절절하다. 강정화 간호사(대자인병원)는 “솔직한 표현을 빌리면 경험한 것 중에 레벨D 방호복이 가장 힘들었다. 방호복은 입는 순간부터 땀과의 전쟁이다. 겨울의 찬기 속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호복을 입고 활동하다 보면 땀이 차서 바지 밑으로 줄줄 샜다. 내 몸부터 너무 힘이 들다 보니 환자들의 고통을 완벽하게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나영 간호사(영주적십자병원)는 “이중·삼중 장갑을 끼고 레벨D 방호복과 장비를 착용하면 10분만 움직여도 땀이 쏟아지고 고글에 습기가 찼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는 자신감은 첫 근무 반나절 만에 없어졌다”고 회상했다.
정보현 충남대병원 간호사는 “초기에는 병실에 들어가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위장이 약한 탓에 숨쉬기도 어렵고, 간혹 헛구역질이 나기도 했다.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런 불안감보다 감염병을 막지 못하면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큰 손실이라 생각하고 견뎠다”고 했다.
◇임종 환자 곁을 지켰던 간호사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임종하는 환자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주리 간호사(대구 가톨릭대병원)는 “당시 병원에 상태가 악화할 경우 심폐소생을 거부하고 편안한 임종을 맞도록 하는 임종실이 마련됐다. 95세 여환자가 처음 임종실로 옮겨졌다. 오 남매를 둔 환자는 매일같이 딸과 손자, 손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난청이 있지만 큰 소리로 얘기하면 들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매일 편지를 읽어드렸다. 큰 소리로 읽어야 하는데, 자주 목이 메어 읽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 고마워. 사랑하고 편안히 치료 잘 받고, 퇴원하면 온천도가고 꽃도 보러 가자.’ ‘할머니 나야. 할머니가 보고 싶어. 다시 꼭 만나요.’ 그리움이 가득 담긴 편지를 읽다 보면 우리들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뒤덮여 있곤 했다”고 적었다.
신혜민 간호사(영남대병원)는 지난해 4월 별세한 한 고령 여환자 기억이 생생하다. “며칠 전 건강상태가 악화되었고, 담당 교수님과 나는 할머니 상태를 예의주시하며 곁을 지켰다. 산소포화도가 조금씩 오를 때, 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스피커폰으로 바꾸어 할머니 상태를 설명하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딸의 목소리에는 이미 슬픔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엄마, 미안해. 그동안 바쁘다며 자주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가 퇴원하면 내가 모시고 살게. 그때는 우리 같이 바다도 보고, 엄마 좋아하는 음식도 먹으러 다니자. 내가 엄마 그동안 너무 외롭게 해서 정말 미안해. 엄마는 누구보다 강하니까, 병도 곧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엄마, 사랑해.’ 크게 키워진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엄마를 찾는 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머니는 간신히 의식을 찾고 나서, 두 눈이 초승달처럼 웃었다. 그 순간 나는 할머니 귀에 대고 ‘할머니, 할머니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가쁜 숨을 쉬며 지금까지는 들어보지 못한 큰 소리로 말했다. ’딸아, 나도… 많이 사랑해. 사랑해.’ 엄마의 말에 딸은 더 큰 울음을 쏟아냈다. 고글 속으로 눈물이 차올랐지만, 침착하려고 애썼다.”
◇”첫 코호트격리 청도 대남병원, 바닥에 토사물과 피”
이재운 간호사(국립부곡병원)는 지난해 2월 25일 코로나 사태로 첫 동일집단격리(코호트격리)된 청도 대남병원에 파견됐다. “그날 밤 우리는 바로 5층 정신과 병동으로 투입됐다. 병동 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하여 90명이 넘는 환자들이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고 생활했다. 바닥에는 피와 토사물, 먼지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환자복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를 정도로 더러웠다.”
시간이 지나자 일부 환자들이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정신과 약을 제대로 먹지 못한 일부 환자들에게서 억눌려 있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투약하는 간호사의 얼굴에 약과 함께 침을 뱉거나, 방호복이 환자의 공격에 의해 찢어지기도 했다. 진정제를 투여하다가 환자의 강한 발길질에 배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정신간호사로서 정신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응급상황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환자 앞에서는 태연하게 주사 처치를 했지만, 걷어차인 복부에 통증으로 병실에서 나온 순간 그대로 주저앉기도 했다. 그렇게 나와 동료는 나흘 동안 밤낮없이 교대로 계속 임무를 수행했다.”
이학도 간호사에게도 대구 파견 당시 아픈 추억이 있다. “대구에 있을 때 매일 병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하루는 집밥이 너무 먹고 싶더라고요. 퇴근길에 숙소인 모텔 근처에 있는 한 밥집에 가서 ‘백반을 1인분 포장을 해달라’고 했어요. 병원 근무복을 입은 채였는데, 식당 사장님이 ‘정말 죄송한데 혹시 병원에서 일하시느냐’고 묻더니 코로나 감염이 걱정되니 그냥 나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서러운 마음에 근처 해장국 집 두 곳에 갔는데 똑같이 쫓겨났습니다. 결국 모텔 근처에 한 우동집이 보여서 사장님한테 ‘정말 죄송한데 우동 하나를 포장해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 사장님이 ‘아유, 안 될 이유가 없죠’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갑자기 저도 모르게 덜컥 그 사장님 손을 붙잡고 펑펑 울었습니다.”
이 간호사는 “돌이켜보면 너무 힘들 때라 서러움이 복받쳤던 것 같다”며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던 때라 다른 사장님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원망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고 웃었다. 그는 “기차 타고 대구에 처음 내려갈 때만 해도 동대구역 앞은 인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며 “대구·경북 유행이 잦아들고 자원 근무가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역 앞 광장에 사람들이 좀 북적이는 걸 보고 괜히 뿌듯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고 했다.
◇”간호사 위한 최고의 방법은 마스크 잘 쓰는 것”
이학도 간호사는 “환자가 회복하고 무사히 퇴원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근무 인계를 할 때 이름이 없어진 환자들이 있어요. 임종하셨거나, 회복해서 퇴원하셨거나 둘 중 하나죠. ‘그 환자 분은 퇴원하셨다’고 말해줄 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전국에서 잇따랐던 응원과 기부 행렬도 힘이 됐다. 이경화 간호사(경북대병원)는 “연일 전쟁터 같은 상황에 응급병동 부서원들의 가족이나 지인, 익명의 대구 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의료인을 응원하는 온정의 손길이 보내졌다. 생수, 커피, 이온 음료, 초콜릿, 파이, 쿠키, 홍삼, 피로회복제 등과 함께 보내온 그들의 응원 편지에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이겨 나갔다”고 했다. 이주리 간호사는 “울산에 사는 여학생이 선물을 보내왔다. TV에서 방호복 때문에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고 손수 헤어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며 “의료진을 위해 음료와 간식 등 기부 행렬이 이어졌다. 여러 기업에서는 홍삼, 비타민 등 건강보조식품으로 의료진들의 체력 보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병원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인력, 물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힘든 시기에 모두 하나 되는 것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학도 간호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달까지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에서 근무하다 이번 달부터 민간 구급 이송 요원으로 일하며 구급 소방대원 특채를 준비 중이다. 그는 “코로나 환자를 이송할 때는 방호복을 입어야 하고, 히터나 에어컨을 켜지 못하기 때문에 추위와 더위에 무방비 상태”라며 “무더위가 오기 전엔 코로나가 종식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간호사 분들을 위하는 최고의 방법은 마스크 착용 등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셔서 병원에 안 오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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