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의맛깊은인생]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맛있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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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초기입니다." 의사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이니까요. 지금 나이면 한 번쯤 찾아옵니다." 의사는 세로토닌 결핍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어야만 제대로 음미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맛이 있다면 아마도 막국수 아닐까.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다 보니 우울증이 나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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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다녀와 아내에게 “올봄부터는 둘이서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자”며 손을 이끌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내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뭐, 앞으로 우리 둘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남은 세월 맛난 거나 먹으러 다니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사는 거지.”
아내와 근처 막국숫집으로 갔다. 내가 살고 있는 파주에는 아주 맛있는 막국숫집이 몇 곳 있다. 오랜만에 찾은 막국숫집. 들기름을 뿌린 고소한 막국수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예전엔 이 맛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가득 차 있는 맛이 아니라 어딘가 비어 있는 맛. 나이가 들어야만 제대로 음미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맛이 있다면 아마도 막국수 아닐까.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니 아내는 “우리도 나이가 들어가는 거지, 뭐”하고 대답한다. 그러게. 문득 서서 뒤돌아보니 여기까지 왔다. 아내는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 나는 눈이 어둑하다. 노트북으로 원고 작업을 하다 보니 목과 어깨에 무리가 와 노트북 거치대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사서 작업하는데, 그러다 보니 노트북 모니터가 뒤로 밀려났고 ‘워드’의 글씨가 안 보인다.
그래도 다시 젊어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누군가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적당히 용서할 줄 알게 됐다. 그건 누군가가 나도 모르게 나를 용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취향이 확실해져 남들 눈치를 그다지 보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하고 감당하기 힘든 일은 슬며시 미루거나 시작을 아예 하지 않는다. 질투 같은 것도 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없어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기 때문이다.
내일은 아내와 어떤 음식을 먹을까. 파주에는 먹어야 할 음식이 많다. 진짜 맛있는 돼지갈빗집과 이북식 만둣국을 파는 식당도 있다. 칼칼한 국물이 일품인 손칼국수도 있고 세련된 비건 식당도 있다.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다 보니 우울증이 나아지는 것 같다. 그렇지, 세상에는 이렇게 먹을 게 많은데 세상을 우울하게 살 필요는 없지. 우리에게 남은 날은 어제보다 하루 줄어들었으니까,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지.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니, 이것보다 더 맞는 말도 없는 것 같군’ 하는 생각이 든다.
최갑수 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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