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성추행 사건' 경찰은 왜 '가짜 대리기사' 걸러내지 못했나

이지혜 기자 2021. 2. 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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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에 적힌 가짜 증거, 진술 정황들
[소속사 액터컴퍼니 홈페이지 캡처=연합뉴스]

성추행 같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제일 먼저 호소하러 달려갈 수사기관은 어디일까요? 왠지 검찰청은 유명인사 수사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네 어디든 있는 경찰서를 찾습니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그래도 소시민 입장에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아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렇게 시작된 사건이 있습니다. 배우 겸 세종대 교수였던 김태훈 씨의 성추행 사건입니다. 2018년 들불처럼 일었던 '미투' 운동에 힘입어 용기를 냈던 대학원생 A 씨는 2018년 8월 김 씨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경찰이 알아서 해주겠지" 했다던 A 씨는 이듬해 2월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무력감을 많이 느꼈죠."

성추행 사건만 10년가량 맡아 수사했다던 담당 경찰만 믿었던 A 씨는 이때를 가장 '좌절했던 때'로 꼽았습니다.

◎ '가짜' 대리기사 그대로 받아들인 경찰

검찰이 재수사를 지휘했고, 사건 수사는 다시 시작됐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던 당일 차를 운전했던 대리기사의 진술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A 씨 측의 요구로 대리기사와 대질신문을 받게 된 자리. 새로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대리기사가 김 씨의 연예계 선배라는 걸 그 자리에서 '고백'한 겁니다. 김 씨가 찾아서 경찰에 알린 증인이란 것도 이 자리에서 드러났습니다. A 씨는 조사 당시 당연히 경찰이 수사로 알아서 찾은 인물일 걸로 생각했다고, 의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이 사람이었다'고 한 걸 경찰이 말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가짜' 대리기사라는 게 밝혀진 것은 1차 수사도, 2차 수사 때도 아닌 검찰 수사 단계였습니다. 수사관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진짜 대리기사가 맞는지 한번 확인해보라고 했답니다. A 씨는 뒤풀이 장소에서 교수의 대리기사를 통상적으로 제자들이 불러주던 걸 기억해 본인 휴대전화를 뒤졌고, 당일 부재중 통화 내용에 남아있던 이를 찾았습니다. 확인 결과, '진짜' 대리기사였습니다.

이 '가짜' 대리기사는 첫 경찰 조사 당시 "여자가 내리고 피고인이 가볍게 등 두드려주는 것 봤고, 여자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고 진술한 인물이었습니다. 김 씨에게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호감 있는 사이였다는 김 씨 주장을 뒷받침하는 진술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0번 정도 김 씨의 대리기사를 했다고도 했습니다. 가짜 대리기사 진술을 토대로 한 부실 수사로 사안이 종결될 뻔했는데, '진짜'가 나타나 상황이 반전된 겁니다.

◎ 판결문 보니…. 수사 허점 그대로

김 씨 측으로서는 깜짝 놀랐을 일입니다. 수사기관만 넘기면 될 일인 줄 알았는데, A 씨가 '진짜'를 찾을 줄 몰랐을 겁니다. 김 씨 측이 오인한 지점으로도 보입니다. 김 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도 A 씨가 '담배를 피웠다'고 주장했는데, 전형적인 '꽃뱀 프레임' 전략을 폈던 거로 보입니다. 품행이 방정하지 않은 여성 프레임을 씌워 성추행 여부와 상관없이 변론하는 건데, 많은 성추행 사건 재판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의문이 남습니다. 경찰은 왜, 1차와 2차 수사에서 대리기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걸러내지 못했을까. 최소한 전화번호 비교 대조를 통해 통신내용 조회만 해 봤어도 알 수 있는 사소한 '팩트'인데, 경찰은 놓친 걸까? 아니면 수사를 하지 않은 걸까. 10여년을 성추행 사건 수사했다던 경찰관은 어찌 된 일인지 조사 없이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대리기사 신원의 진위 파악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가짜' 대리기사의 진술이나 정황 증거는 구체적이고 납득 할 만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경찰이 초기에 놓친 이유를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작심하고 속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속지 않았겠냐"라고 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취재한 바에 따르면, 경찰은 그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17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선고한 1심 판결문을 입수해 분석해보니, 검찰 수사로 재개된 경찰의 2차 조사에서 가짜 대리기사와 김 씨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이 나옵니다.

(가짜 대리기사) "김 교수 전화 아닙니까. 전화 너무 많이 했네요. 전화를 받으세요."
(김 씨) "제가 병원 진료 중이었습니다. 제가 계속 전화했었습니다. 저 기억하시지요? 예전에 대리해주시던 거요."
(가짜 대리기사) "아. 알지요. 알고 말고요. 제가 1시 40분쯤에 전화할게요. 받으세요."
(김 씨) "네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연락 안 돼서 계속 찾았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2018년 9월 15일

처음으로 연락한 사이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나흘 전인 2018년 9월 11일 가짜 대리기사가 김 씨에게 전화 걸어 음성통화를 했고, 9분간이었던 걸로 밝혀졌습니다. 2차 수사가 개시된 2019년 5월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김 씨를 기소의견으로 송치하면서 대리기사에 대해서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았던 거로 파악됩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왜 9분간 음성통화가 이뤄졌는지, 그런데도 왜 이 문자에서 이제야 처음 상대방을 확인하는 것 같은 문자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위 문자 내용은 일정한 의도 아래 인위적으로 적출된 것이라는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사건 발생 때도 (가짜 대리기사가) 실제 대리기사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수상한 지점은 또 있습니다. 김 씨 측이 내세운 '조작된 증거'와 관련 증인들의 '허위 진술'입니다. 이 역시 판결문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김 씨는 학내 진상조사 당시 술집 장부를 촬영한 동영상을 제출했습니다. '김태훈 교수님, 현금, 23:55~02:05, 35만원'이라고 적힌 것입니다.

이 술집 주인은 당시 이와 같은 장부가 있었다고 했지만 이후 검찰에 가서는 "장부를 폐기했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법정에서는 누가 장부에 기재돼 있든지에 대한 설명도 바꿨다고 합니다.

술집 장부 역시 가짜라는 게 밝혀진 건 검찰 수사에서 날짜와 시간 등이 뒤죽박죽인 게 드러나면서였습니다.

◎ 경찰 해명 들어보니…." 전체적으로 불기소할 만했다"

그렇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입장은 뭘까. 해당 경찰은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는 입장을 전해왔습니다. 사후적으로 보면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당시 성추행 사건의 본질을 조사하느라 '가짜 대리기사'나 '조작된 술집 장부', '허위 진술' 등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당시 대리기사가 누군지도 기억을 못 해 대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용산경찰서 현판 [연합뉴스TV 제공]
결국 사건을 전체적으로 봐서 불기소 결정했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해당 경찰관이 놓친 '세밀한 부분'은 사건의 본질을 '거짓'으로 만들거나 피해자가 무고 혹은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할 수 있었던 위험한 사안이었던 점은 자명해 보입니다. 또한 문화예술계 특성과 김 씨가 세종대 등 대학 연극계에서 끼쳐왔던 영향력을 고려하면, 불기소로 끝났다면 '미투' 폭로를 한 A 씨의 경우 설 자리가 없었을 거로 보입니다. 이미 A 씨의 경우 미투 이후 김 씨 측이 제공한 신상정보로 인해 언론과 주변에 신상이 노출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 밝혀지지 않을 뻔한 사실들….' 2차 가해'

재판부는 앞에서 살펴본 대리기사와 이 술집 주인의 진술 변화가 있던 경위에 대해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정반대의 진실들이 밝혀지는 데 따른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진실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2차 가해가 계속됐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피고인 자신도 물론 큰 고통을 입어왔지만, 그런 피고인의 태도 때문에 강제로 이 절차에 끌려들어 와 조사받고 증언하고 자신의 의사 표출을 강요당해야 했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 피해자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3년 동안 이어져 온 지루한 싸움. A 씨 측 변호를 맡은 오선희 변호사는 "같은 업계 같은 직종에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전형적인 문제가 2차 가해"라며 "김 씨가 A 씨의 신상을 알리고 사건 내용에 대해 공격하는 형태로 2차 가해가 많이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김 씨가) 뒤로는 지인들을 이용해 합의를 안 하냐고 하고, 피해자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인격적으로 많은 공격을 했다"며 "미투 사건이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힘들게 하는지, 가해자가 이렇게 하면 엄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재판부가 던져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난 17일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 씨. 그는 지난 19일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검찰도 항소해, 조만간 항소심이 열릴 예정입니다. 1심 법원이 판단한 '2차 가해'의 심각성에 대해서 항소심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할까요?

A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 씨의 목적이 고소를 포기하게 하는 거였어요.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무너지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짓말이나 조작된 것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미투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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