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국력·자주의식 높은 지금이 '중립화 선언' 적기죠"

강성만 2021. 2. 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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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중추사 이현배 대표

이현배 ‘한반도 중립화를 추진하는 사람들’ 상임대표가 <한겨레>와 인터뷰한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오는 3월 1일 낮 1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한반도 영세중립화 선언문’ 낭독 행사가 열린다.

이현배(77) ‘한반도 중립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이하 중추사) 상임대표 등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부대 행사로 임진택 판소리 명창이 연출한 마당극도 펼쳐진다. 가상의 상황극인 이 공연에는 한반도 주변 4대 강국 지도자들이 탈을 쓰고 나와 한반도 상황을 놓고 한바탕 격론한 뒤 한반도 중립화가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한반도 중립화만이 통일을 가로막는 상호불신과 군사적 대치라는 장애를 해소하고,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억압의 고삐를 끊는 유일한 길이다. (중략) 이 중립화의 길은 비단 우리 민족 생존만을 위한 게 아니라,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을 포함한 인접 국가들의 공동 이익에도 부합한다.” 이달부터 온라인 서명을 받는 한반도 영세중립화 선언문의 일부다.

지난해 6월25일 창립한 중추사의 이현배 상임대표를 지난 19일 서울 종로3가역 근처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대표는 유신 시절인 1974년 독재자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해 꾸민 ‘민청학련 사건’ 사형수 일곱(여정남·김지하·이철·유인태·나병식·김병곤 등) 중 한 명이다. 경북대 졸업생인 여정남과 이 대표를 뺀 다섯은 군사재판 1심 판결 뒤 일주일 지나 국방부 장관 결재 과정에서 무기로 감형됐지만 이 대표는 1심 두 달 뒤에 열린 2심에서야 무기 판결을 받았다. 여정남은 끝내 감형을 받지 못하고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7명과 함께 ‘사법살인’ 희생자로 생을 마감했다. 시인 김지하와 함께 ‘민청학련 조직원’ 후배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은 이 대표는 4년 6개월 옥살이를 하고 1978년 광복절에 풀려났다.

역사학 교수가 되려고 63년에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간 이 대표는 이듬해부터 줄곧 박정희 정권의 폭정과 맞선 학생운동의 첨병 노릇을 했다. 64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 때는 김지하 등 선배 그룹이 수배당하면서 2학년인 그가 앞장서 6·3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67년에는 서울대민주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박정희 정권이 그해 총선에서 저지른 불법과 부정을 규탄하는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90년대 초에는 경실련 2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사회, 경제적 정의를 추구하는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60, 70년대는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 최종목표였어요. 독재자가 사라지면 민주화는 물론이고 사회, 경제적 정의도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금 와서 보니 형식적 민주주의가 꽃핀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경제적 정의는 요원하고 사회 갈등도 풀리지 않았어요. 이렇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분단과 외세 개입입니다. 자주성 없이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가 중추사 결성에 직접 나선 계기는 이른바 ‘사드(미국 탄도탄 요격유도탄 체계) 사태’란다. “한국 사드 배치 문제로 미·중 갈등이 벌어지면서 4년 전에 중국이 한국에 경제 제한을 가해 우리 여행업계가 큰 타격을 받았잖아요. 그때 충격이 컸어요. 그 상황을 보면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미·중 갈등의 피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중립화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북핵 문제를 놓고 미국이 두 번이나 북에 전쟁 위협을 했잖아요. 하지만 북이 최후 생존수단인 핵을 쉽게 포기할 리 없어요.”

중립화는 쉽게 말해 다른 나라들 전쟁이나 분쟁에 편을 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중립국은 자위 목적이 아닌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고 자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일지 모르는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아야 한다. 유럽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남미의 코스타리카 등이 대표적인 중립국이다. 한말에 고종도 러-일 전쟁을 앞두고 중립화를 선언했지만 한반도를 욕심내던 강대국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중립화의 구체적 경로’를 묻자 이 대표는 200명이 넘는 중추사 회원들이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며 답했다. “첫 단계는 남과 북의 동시 중립화 선언이죠. 그다음엔 남북국가연합을 구성해 중립화와 통일을 대비하는 협의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북과 미·중 등 한국전쟁 주교전국이 평화회담을 열어 중립화 등이 포함된 평화조약을 일괄타결합니다.” 그는 북핵 문제는 외교나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도 했다. “남북한 전 성원이 대동단결해 대중운동으로 중립화를 이룰 때 핵문제도 풀 수 있어요. 그때 남한의 자주성 확보도 가능합니다.”

작년 6월 한반도 영세 중립화 목표
‘중립화를 추진하는 사람들’ 결성
내달 1일 탑골공원서 선언문 낭독
“북한 핵 유일한 해법은 중립화뿐”

64년 대학 2학년 때 ‘6·3 시위’ 주도
‘민청학련 배후조종 사형수’ 고행

종전 선언이나 평화 협정을 외치는 기존 통일운동 진영에서 볼 때 중립화는 다소 뜬금없다고 여겨지지 않을까? “우리도 종전 선언에 찬성해요. 하지만 종전 선언에는 북핵을 어떻게 할지가 빠져 있어요. 외국군 주둔 기지나 철수 이야기도 없어요. 그래서 종전 뒤에도 남북 긴장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죠. 최소 방위력으로 국가를 방어하는 중립화 선언으로 북핵과 외국군 철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어요.”

그는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과 조성우 겨레하나 이사장 등 오래 통일운동을 해온 분들이 중추사 활동을 지지하고 있으며 미국 동포 단체인 미주민주참여포럼 회원들도 상당수가 서명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중추사 공동대표는 장영달 전 국회 국방위원장과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김경임 전 튀니지 대사이며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등은 고문을 맡고 있다. 사무총장은 임상우 전 서강대 부총장이다.

‘한-미 동맹’이 국시나 다름없는 남한에서 군사동맹을 부정하는 중립화가 현실성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중립화로 가는 가장 큰 어려움은 남한에서 사람들의 의식을 (중립화 쪽으로) 단합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북한 성원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죠. 그다음이 외세입니다. 내세가 강하면 외세는 해결될 수 있어요. 지금 국제 관계도 한반도 중심으로 보자면 국제역학이 균형을 이루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지금 남한과 북한의 국력이나 자주적 의식도 어느 때보다 높아요. 이렇게 내외 여건이 합치되고 있어 중립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상당수 한국인은 ‘정전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한국전쟁을 잠시 멈춘 53년 7월 정전 협정 뒤로 한국인들은 묶인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이 마비 상태를 깨는 거죠. (제가) 나이는 먹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움직여야 뭐라도 일어나지 않겠어요.”

이 대표는 오는 1일 낭독할 선언문은 세계 주요 국가의 정부와 언론에도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지금 70대가 중심인 중추사에 청장년 회원을 수혈하는 것도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중추사에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젊은 회원 확보에 힘을 쏟으려고 해요. 체육이나 연예 등 직능별 그리고 지역별 지부도 만들고 뉴욕이나 워싱턴, 베를린 쪽에도 따로 지부를 두려고 해요. 또 우리 역량을 봐가면서 국회가 먼저 중립화를 제기할 수 있도록 움직이려고 해요. 아직은 우리 힘이 부족해 정부 쪽에 이야기하는 것은 미루고 있어요. 그렇게 하면 서로 부담이 될 수 있죠.”

이현배 중추사 상임대표. 강성만 선임기자

이 대표는 민청학련 조작 사건에 김지하 등과 함께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그는 서울대 사학과 대학원을 수료하고 동학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의 인간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가 후배들에게 데모하라고 했으니 배후조종은 맞죠. 서중석이나 유인태, 안양로에게 유신에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은 학생밖에 없으니 너희들이 치고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저나 조영래 같은 선배 그룹과 학생들 사이 연결은 서중석이 담당했어요.”

그는 여정남을 제외한 민청학련 사형수 여섯 중 유일하게 2심까지 가서 무기로 감형됐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대 장기학적을 보유하며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생각한 저를 김지하와 함께 없애버리려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김지하는 문인이고 가톨릭 신자여서 죽였다가는 시끄러울 것 같고 저는 시인도 아니고 교회도 안 나가니 ‘이놈으로 하자’고 생각했겠죠.” 그는 사학과 입학 8년 만인 71년에 졸업장을 받았고 이듬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렇다면 여정남과 그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확실한 답은 알 수 없다며 이런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제가 사형 선고를 받은 충격으로 당시 임신 35주이던 아내가 양수가 터지면서 패혈증으로 사경을 헤맸어요. 조산한 아들은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죠. 제 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죠. 1심 선고가 난 뒤 황인철 변호사 부탁으로 김옥길 당시 이화여대 총장이 박정희 부인 육영수씨를 만나 이런 상황을 전하며 구명을 부탁했다고 해요. 육영수씨는 이야기를 듣고 김 총장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말해보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2심 한 달 전에 육영수씨가 문세광 총탄에 죽음을 맞았어요. 그러자 김 총장이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근혜를 만나 부탁했다고 해요. 그때 박근혜는 ‘난 정치 문제는 관여하지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고 해요. 제가 무기로 감형된 게 육영수씨가 남편에게 이야기한 덕인지 아니면 박 정권 차원의 다른 고려 때문인지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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