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좌파주의' 논쟁 거세진 프랑스..우파 지지 얻으려는 "혐오의 정치" 비판
[경향신문]
‘이슬람 좌파주의’(Islamo-gauchisme)라는 단어가 프랑스 사회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가 이슬람 좌파주의가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며 사회과학 연구기관을 조사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이같은 인종 문제를 강조하고 분열주의적인 이론들이 미국에서 수입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학계는 물론 미국에서도 “마크롱 정권이 실체도 없는 개념을 동원해 보수표를 얻으려고 ‘혐오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프레데리크 비달 프랑스 고등교육연구혁신부 장관은 지난 16일(현지시간) 의회 대정부 질의에서 “대학 내의 이슬람 좌파주의에 대한 조사를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의뢰했다”며 “학문적 연구에 속하는 것과 사상이나 운동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는 14일 프랑스 보수 방송매체인 세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이슬람 좌파주의가 사회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비달 장관은 그러나 이슬람 좌파주의의 개념을 묻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슬람 좌파주의’는 논문마다, 사람마다 의미하난 바가 다르지만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비난을 거부하고, 이슬람을 포용하자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는다. 프랑스 우익들 사이에서 확산된 용어로 이슬람 극단주의와 좌파 성향의 지식인이나 활동가들을 연관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지난해 10월 토론수업에서 ‘샤를리 앱도’의 이슬람 선지자 풍자 캐리커쳐를 보여줬다는 이유로 중학교 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 살해되고 이어 노트르담 성당에서도 참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이슬람 좌파주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그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참수 사건 직후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는 이슬람 분리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프랑스 공화주의 원칙인 라이시테(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지키며, 프랑스 사회를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특정 사회과학 이론이 문제를 지닌 채 미국에서 수입됐고, 이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켰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올바름(PC), 인종차별이나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고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woke’ 등을 강조하는 미국의 탈식민주의 이론이 수입돼 프랑스를 망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16일 하원이 이슬람의 관습을 제한하는 ‘공화국 원칙 강화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안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교육 등 다른 목적으로 쓸 수 없도록 했고, 만3세가 되면 프랑스 정규 교육 과정에 의무적으로 입학시키도록 했다. 종교단체가 “증오와 폭력을 유발한 것”으로 드러나면 정부가 사원을 폐쇄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마크롱 정부의 이슬람 좌파주의라는 이름의 문화전쟁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600여명의 대학 교수들은 “학문을 검열하려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다”며 비달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조사를 요청받은 CNRS도 성명을 내고 “특정 공동체에 낙인을 찍고, 탈 식민지 연구, 인종 연구 등을 불법화하려는 시도를 비난한다”고 밝혔다.
르몽드는 지난 19일 ‘이슬람 좌파주의: 비달의 위험한 게임’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학문적 자유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또 마크롱 대통령이 코로나19 실정을 덮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우파들의 시선을 잡으려 한다고 꼬집었다. 파리 8대학의 연구교원이자 사회학자인 에릭 파생은 지난 18일 프랑스앵포에서 “이슬람 좌파주의는 어떤 과학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극우진영의 논쟁적 슬로건일 뿐이다”이라며 “마녀사냥과도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언론들도 마크롱 대통령이 미국을 프랑스의 위협으로 지적한 데 주목하며 그가 내년 대선을 위해 우익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로 대응 실패와 경제 위기 등으로 우파 후보인 마린 르펜의 지지율이 마크롱 대통령과 대등한 정치적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이란 것이다. 최근 프랑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마크롱(28%), 르펜(27%)의 성적표는 막상막하로 예측됐다.
데니얼 드레즈너 터프츠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비달 장관 등은 이슬람 좌파주의의 개념부터 정확히 정의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다면 미국 사회과학자들은 최근 일련의 행동들이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마크롱의 책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프랑스인들 사이에 확산된 반이슬람 정서를 고려하면 이슬람 억압 정책이 정치적이라고 비판할수만은 없다는 견해도 있다. 홍태영 국방대 안보정책학과 교수는 “이번 법안을 밀어부친 건 이슬람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반감이 누적된 이유도 있다”며 “참수 테러도 프랑스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었고, 누가 대통령이 됐든 이슬람을 배척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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