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세상의 저녁] 정인이 죽음 앞에서

한겨레 2021. 2. 23. 16: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찬의 세상의 저녁][아동학대 '비극']정인이 죽음이 '인류학적 사건'인 것은 아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가장 무력한 존재이자 가장 순결한 존재이다. 이 무력하고 순결한 존재를 학대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하게 한다. 이 질문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레비나스 철학의 테제를 떠올린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 ㅣ 소설가

16개월 여자아이 정인이가 양부모의 지속적 학대로 입양 9개월 후인 2020년 10월13일 숨졌다. 사인은 췌장 파열 등 복부 손상과 그로 인한 과다출혈이었다. 그동안 아동학대 의심 신고가 세차례 있었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부모와 20여차례 면담했으며, 경찰 수사가 두차례 있었으나 정인이 죽음을 막지 못했다. 들끓는 여론 속에서 국회는 2021년 1월8일 ‘정인이법’을 통과시켰다. 부모에게 버려진 정인이가 새 부모의 가정 속으로 들어가 여린 몸이 폭력에 의해 부서지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한편의 연극처럼 느껴지는 것은 상황이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아동학대 처벌법은 2014년 1월 제정된 ‘서현이법’이었다. 여덟살 서현이는 새엄마의 학대로 2013년 10월 숨졌다. 서현이 죽음 이전까지 아동학대는 예방 및 사후관리 중심으로 다루어졌을 뿐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서현이법’과 ‘정인이법’ 사이에 ‘원영이법’ ‘은비법’ ‘준희법’이 있었고, ‘정인이 사건’ 이후에도 눈을 감게 하는 아동학대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여기에서 아동학대가 일상적 행위가 되었다는 무참한 사실이 목도된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하루 평균 50명의 아동이 학대받으며, 매달 2.6명의 아동이 학대로 사망한다. 지난 2월9일에는 친생부모가 생후 2주밖에 안 된 아이를 때려 숨지게 했다. 숨진 아이의 한살 위 누나도 지난해 이들 부모의 학대로 아동보호기관에 머물고 있음이 밝혀졌다.

아동학대 가해자의 70% 이상이 친생부모다.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 보호자다. 부모가 절대적 괴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절대적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보호자와 절대적 괴물 사이에 어떤 심연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동학대의 진정한 무서움은 학대를 경험한 아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신의 아이를 학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에 있다. 이 상처의 사슬은 가해와 희생이 끊임없이 교차됨으로써 가해자와 희생자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는 혼돈과 미로의 세계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환기한다. 이것의 끔찍함은 희생자가 자신이 희생자임을 모르고 있고, 가해자가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희생이 명료함에도, 그리하여 희생자가 사회를 향해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공동체가 가해자를 찾지 못하거나 찾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정인이 사건’의 의미가 큰 것은 언론의 집중 보도로 아동학대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에 10만명이 넘게 참여했고, 법원에 엄벌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탄원서가 쇄도했다. 가해자를 살인자로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에 23만명 이상 참여했으며, 에스엔에스(SNS)에서는 정인이 죽음에 대한 글이 넘쳐흘렀다.

“어느새 나는 정인이가 되어 울고 있다. 우린 이런 피해자 경험이 너무 많다.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도 세상이 바뀐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제 내가 느꼈던 죄책감의 실체를 조금 알 것 같다. 피해자 편에 선 ‘나’에게 만족하고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마음 독하게 먹고 나는 나를 가해자로 규정한다. 좋은 사람 역할은 그만하자. 그것 역시 반복되면 가해자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글쓰기 플랫폼에 누군가가 올린 위의 글은 중요한 질문을 품고 있다. 가해자는 악을 행한 자이기에 피해자 편에 서는 것이 윤리적 행위다. 이 행위에 만족하고 불행한 사건을 금방 잊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게 아닌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글쓴이는 피해자 편에 섬으로써 윤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에서 가해자로 전환하는 실존적 결정을 한다. 이 전환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세상에는 ‘나’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 무수히 일어난다. 그 사건들은 ‘나’를 스쳐 지나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나’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리된 사건에 스스로 책임을 느끼는 순간 그 사건은 ‘나’와 직접적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정인이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폭력의 고통은 정인이에게는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다. 여리고 순결한 생명체였던 정인이에게 고통은 그 자체가 절대적 악일 뿐이다. 하지만 정인이의 죽음을 ‘슬픔’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이에게 정인이의 고통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정인이가 겪은 고통을 통해 정인이라는 모르는 생명체를 생생히 느끼기 때문이다. 정인이의 죽음에서 흘러나오는 정인이의 고통이 그 사람의 내면으로 스며듦으로써 정인이는 죽음의 캄캄한 어둠에서 생명체로 깨어나는 것이다.

글쓴이가 자신을 ‘정인이 사건’ 가해자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숨진 정인이를 자신의 내면에서 생명체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변화를 통해 글쓴이는 정인이와 직접적 관계를 맺었다. 세상의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관계는 변화의 싹이다.

정인이 죽음이 ‘인류학적 사건’인 것은 아이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가장 무력한 존재이자 가장 순결한 존재이다. 이 무력하고 순결한 존재를 학대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하게 한다. 이 질문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레비나스 철학의 테제를 떠올린다. 나의 삶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그의 테제는 타자를 나의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고 한정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로 변화시키면서, 내가 타자에게 진 도덕적 빚은 결코 갚아질 수 없기 때문에 나와 타자는 ‘무한의 관계’라는 사유로 나아간다. 이 무한의 관계에서 타자의 고통이 나의 책임이라는 놀라운 인과관계로 확장하면서 인류가 겪는 모든 고통 속에 나의 책임이 있다는 무한 책임을 이끌어낸다.

레비나스에게 무한의 존재인 타자는 놀랍게도 약하고 헐벗은 자다. 이 약하고 헐벗은 타자의 고통에 내가 무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나의 ‘유한성’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 사유의 귀결점이다. 폭력 앞에서 가장 약하고 헐벗은 존재가 아이다. 아이들이 끊임없이 살해당한다는 것은 ‘무한한 존재’가 끊임없이 살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는 것은 이 황폐한 세계를 밝히는 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살해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모두 가해자인 것이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