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태움' 당한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끝내 못받은 사과
"업무를 하는데 설명을 하나도 못 들어봤다,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하겠다, 스트레스가 가득해 정신을 못 차리겠다."
신입이었던 고 박선욱 간호사가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대표적인 도제식 교육 직종인 간호사 세계에서 '프리셉터 또는 엄마'라고 불리는 선배들은 '프리셉티 또는 아기'라고 불리는 신입 간호사들을 맡습니다.
프리셉터에게 '일 못 하는 애'로 찍히면 병원 생활이 고달파지기 때문에 신입 간호사들의 하루하루는 살얼음판 걷듯 조심스럽습니다.
프리셉터는 괴롭힘을 교육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신입 간호사의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입사 5개월 만에 하얗게 태워진 죽음
2018년 설 연휴 첫날, 고 박선욱 간호사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서울아산병원 간호사로 일한 지 고작 5개월 만이었습니다. 박 간호사는 업무에 대한 압박감과 함께 일하는 간호사의 눈초리를 언급하며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자고 끼니는 매번 거르고 있다'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일을 능숙하게 해내지 못하는 신입 간호사의 영혼이 하얗게 재가 될 때까지 괴롭힌다는 이른바 '태움' 악습이 공론화됐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간호사들과 유족들은 함께 거리에 나섰습니다.
바라는 것은 '병원 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였습니다.
당시 경찰은 '태움'이라고 불리는 가혹 행위를 확인할 수 없다며 내사 종결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서울동부지법은 박 간호사의 유족이 병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병원 측이 유족에게 3천 9백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지난해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신입 간호사인 박 씨에게 적절한 교육 없이 과중한 업무를 맡겼고, 이로 인한 압박감과 피로가 더해져 자살에 이르렀다"라며 "이를 예측할 수 있었던 병원이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병원 측에 40%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의 판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단 측은 2019년 박 간호사의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며 "적절한 교육 체계나 지원 없이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 피로가 누적되고 우울감이 증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의 판단에도…"서울아산병원 측 묵묵부답"
박 간호사의 죽음에 서울아산병원 측 책임이 있다는 연이은 판단에도 사과는 없었습니다.
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 사건 진상 규명과 산재 인정 및 재발 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고인의 사망 3주기를 맞아 오늘(23일) 병원 앞에 섰습니다.
이들은 "서울아산병원은 법적 판결에도 불구하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고, 면담을 요청하는 유가족과 공대위의 공문에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라며 "유가족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은 본인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3주기를 추모하며 (고용노동부) 동부지청장에게 사과 주선과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하며 면담 요청을 했지만, 이미 종결된 사건이고 특별근로감독은 절차를 밟아 요청해달라는 답변을 받았다"라며 "사과 한마디 받지 못했는데 이미 끝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대위 측은 말합니다. "이제 막 독립한 간호사가 담당하기엔 많았던 환자 수, 항상 초과 노동에 내몰리지만 인정받을 수 없었던 노동들, 밥도 못 먹고 뛰어다니는 항상 바쁜 상황에서 서로를 돌봐줄 수 없었던 조직 문화 등은 간호사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서울아산병원이 만든 구조적인 문제였다"라고 말입니다.
공대위는 박 간호사 사망 이후 병원 측의 사과와 재발 방지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했습니다. 시민 3천 7백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간호사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귀한 딸, 소중한 가족이었을 박 간호사의 죽음을 모두 안타까워했습니다. 시민들은 '마음을 앓다 떠나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 '진심 어린 사과와 사후 대책 마련으로 병원 스스로 부끄러움을 씻어야 한다'는 의견을 남겼습니다.
공대위와 유족들은 박 간호사에게 '늦었지만, 병원 측의 사과를 받았다'고 '이제 간호사들에게 태움 없는 세상이 왔다'고 말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세희 기자 (3h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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