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친일파를 원숭이에 빗댔다며 동아일보 임원들 몰매

이진 기자 2021. 2. 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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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 11일

플래시백

1924년 4월 2일 오후 7시, 경성 남산자락의 음식점 식도원에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취체역 김성수가 자리 잡았습니다. 취체역은 이사를 말합니다. 두 사람은 유민회라는 단체의 간부인 이풍재의 초청을 받았죠. 이풍재는 자기 말고도 4명이 더 참석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도쿄 유학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좀 뜸했으니 얼굴이나 보며 회포를 풀자는 취지였죠. 두 사람은 꺼림칙했지만 예전 친분을 내세운 초청을 거절하기도 뭣해 갔습니다. 하지만 함정에 발을 들여놓은 결과가 되고 말았죠.

두 사람이 초청을 꺼린 이유는 3월 25일 ‘각파유지연맹’이라는 단체가 설립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민협회 조선소작인상조회 유민회 노동상애회 조선경제회 교풍회 동광회 유도진흥회 청림교 대정친목회 동민회 소속 34명이 깃발을 들었죠. 각파연맹은 ①관민일치 시정개선 ②대동단결 사상선도 ③노자협조 생활안정의 3대 강령을 내걸었습니다. 그 속뜻은 ①은 총독부에 협조 ②는 독립사상 반대 ③은 사회주의 배격이었죠. 대신 이들은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고 참정권을 달라고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각파연맹이 설립된다는 소문에 비판 사설을 실었습니다. 3월 30일자 ‘소위 각파유지연맹에 대하여’에서는 ‘일본과 융화를 선전하고 알선할 테니 대가를 좀 주시오’라는 말과 다름없다고 혹평했죠. 3·1운동 후 이들 단체가 일제에 아부하다 용도폐기, 토사구팽 될 듯하자 연맹으로 살 길을 찾으려는 파리떼, 개미떼라고 야유했습니다. 4월 2일자 ‘관민야합의 어리운동’에서는 연맹의 강령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는듯하다고 비유했죠.

식도원에서 송진우 김성수와 마주앉은 조선소작인상조회의 채기두는 연맹은 돈도 많고 총독부 후원도 막강해 밀약을 맺으면 큰 이익이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조선자치를 위해 손을 잡자는 제안인 셈이었죠. 하지만 독립이 목표였던 송진우는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채기두는 자신들을 파리 개미 원숭이 따위로 비유한 사설에 시비를 걸었죠. 송진우는 인신공격은 유의하겠지만 잘못된 주장에는 비판을 멈출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곧 옆방에 있던 박춘금 등 약 20명이 몰려왔습니다. 박춘금은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놈은 죽인다”고 소리 지르며 송진우를 때리기 시작했죠. 다른 자들도 폭행과 욕설을 해댔습니다. 박춘금은 김성수에게 권총을 겨누며 당장 쏠듯이 협박했죠. 맥주병을 치켜들고 음식접시를 던지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난동으로 식도원은 3시간 동안이나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특히 폭행에 앞장선 박춘금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현지 폭력배와 친분을 쌓은 뒤 1921년 상애회를 만들어 동포의 직업소개에 나섰지만 사실은 폭력·착취조직의 우두머리였죠.

박춘금은 간토대지진 때는 동포 노동자들로 봉사대를 만들어 시체를 처리해줘 일제의 눈에 들었죠. 1924년 경성에 노동상애회를 조직했고 총독부 경무총감 마루야마 쓰루키치의 조종을 받아 동아일보를 상대로 재외동포위문금 중 3000원(현재 약 2700만 원)을 자기 단체에 달라고 괴롭혔습니다. 몽둥이와 단도를 지닌 채 떼를 지어 일곱, 여덟 차례나 몰려와 행패를 부렸죠. 박춘금은 식도원에서도 위문금을 내놓으라고 김성수를 위협했던 것입니다.

송진우는 인신공격은 유감이라는 쪽지를 써줬고 “쏠 테면 쏴라”고 버티던 김성수는 개인 돈으로 3000원을 주겠다고 하고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김성수는 이틀 뒤 3000원을 들고 마루야마 경무국장을 직접 찾아갔죠. “이 돈을 박춘금에게 줄 때 당신이 입회하든지 아니면 당신이 직접 주라”고 말했습니다. 박춘금을 배후조종한 마루야마는 당황한 나머지 일주일 안으로 그를 쫓아내겠다고 약속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폭행 사태는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우리 언론 전체를 욕보인 만행이었기에 곧 전 언론사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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